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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5년(헌종11년) 6월 제주도 '우도' 앞바다에 정박한 후 30여명이 보트 3척에 나누어 타고 우도에 상륙하여, 섬 연안을 1개월 동안 돌아다니면서 수심을 측정하고, 전라도 흥양(고흥) 초도, 강진 여서도, 장흥 평일도, 해남 지역 등 서남해를 탐사하고 거문도에 들러 "해밀튼항(Port Hamilton)"이라 명명한 영국 군함 사마랑호였다.

 

함장 Edward .Belcher(1799-1877)는 1848년에 " Narrative of the voyage of H. M. S. Samarang, during the years 1843-46" 이라는 책을 발간하였으며, 사마랑호는 1847년 6월에 프랑스 군함 글로아르호가 전라도 만경 신치도 부근에 도착했으나 암초에 좌초되자 1847년 8월 다른 2척과 함께 상해로부터 출동하여 구조해준 바 있다.

 

조선 조정은 사마랑호에 대해 이들이 무역을 강요하기 위하여 온 것으로 판단하고, 사마랑호의 내조 사실을 청국과 일본에 통보함과 동시에 청국을 통하여 조선이 금단의 땅임을 영국측에 통고하여 다시는 그러한 사건이 없도록 조처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시 제주도민은 마치 난리라도 난 것처럼 20여 일 동안 생업이 마비될 정도였고, 그 후 도민들을 동원하여 해안가에 환해장성을 수축하여 만일에 대비하였다.

 

 

 

헌종11년6월29일 조선왕조실록

이달에 이양선(異樣船)이 호남(湖南) 흥양(興陽)제주(濟州)의 바다 가운데에 출몰 왕래하며 스스로 대영국(大英國)의 배라 하면서 이르는 섬마다 곧 희고 작은 기를 세우고 물을 재는 줄로 바다의 깊이를 재며 돌을 쌓고 회를 칠하여 그 방위(方位)를 표하고 세 그루의 나무를 묶어 그 위에 경판(鏡板)을 놓고 벌여 서서 절하고 제사를 지냈는데, 역학 통사(譯學通事)가 달려가서 사정을 물으니, 녹명지(錄名紙)라는 것과 여러 나라의 지도(地圖)와 종려선(棕櫚扇) 두 자루를 던지고는 드디어 돛을 펴고 동북으로 갔다.

 

 

헌종11년7월5일 조선왕조실록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김도희(金道喜)가 아뢰기를, “이양선(異樣船)에 대해서 제주(濟州)에서 사정을 물었을 때에 받은 번물(番物) 여러 가지는 그대로 봉하여 제주로 돌려보내 인봉(印封)해 두고 혹 뒷날 이것을 가지고 증거로 삼을 때를 기다리게 하겠습니다마는, 이 배가 세 고을에 두루 정박한 것이 거의 한 달에 가까운데 상세히 사정을 묻지 못하였습니다.

 

번인(番人)의 형적은 멀리서 헤아리기 어려운데, 일찍이 선조(先祖) 임진년에 영국 배가 홍주(洪州)에 와서 정박하였을 때에 곧 돌아갔어도 그때 곧 이 연유를 예부(禮部)에 이자(移咨)한 일이 있었고, 그 뒤 경자년에 또 저들의 배가 제주에 와서 정박한 일이 있으나 잠깐 왔다 빨리 가서 일이 매우 번거롭기 때문에 버려두고 논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은 임진년의 일보다 더 이정(夷情)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있고 사정을 묻는 가운데 청나라 통사(通事)가 있다 하였다 하니, 사전의 염려를 하지 않아서는 안 될 듯합니다.
임진년의 전례에 따라 역행(曆行) 편에 예부에 이자하고 황지(皇旨)로 광동(廣東)의 번박소(番泊所)에 칙유(飭諭)하여 금단하게 하도록 청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자료제공 : 한국범선모형동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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