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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톤, 포 16문, 길이 33미터인 Sloop로, 영국 해군 브로이튼(William Robert Broughton)의 지휘 하에 그 당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북태평양을 탐사, 타타르 해협으로부터 조선의 영흥만 앞바다를 거쳐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면서 관측한 후, 부산 동래포에 상륙하여 우리측 사료에 처음으로 이국선으로 불러졌던 배이다.

 

1797년 10월(정조 21년)에 부산 동래 용당포에 나타나자, 경상도 관찰사였던 이형원과 동래부사 정상우 등은 프로비던스호의 제원에 대해 상세히 조사하여 보고하는 데 그쳤고, 조선 조정도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현계흠(玄啓欽)이라는 천주교인은 프로비던스호에 승선한 뒤 '그와 같은 배 한 척만 있으면, 조선의 전선 100척은 쉽게 무찌를 수 있다'고 말한 죄로 고문을 당하고 투옥되었고, 정조 21년(1797년) 사료에 "외국인 50명이 표착하여, 배에 올라 보니 쌀 3,000섬(1섬=144 kg)을 실을 수 있다."고 부산 동래포에서 보고되어 있다.

 

라페루즈의 부솔호 보다 10년 뒤 조선에 찾아온 브로이튼의 프로비던스호는 현재의 강원도 고성 조금 북쪽 한반도 가까이에 울릉도로 보이는 아르고노트(Argonaute) 섬을 발견하였다하여, 1820~50년경의 서양 지도에는 라페루즈가 붙인 다줄레섬(울릉도) 외에 아르고노트 섬도 나타나 있는데, 그 후에 아르고노트는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어 19세기 중엽 이후에는 지도상에서 사라졌으며, 서양인 최초 조선의 식물채집된 계기가 된다.

 

 

 

프로비던스호는 1797년 5월15일 타이완 부근 Tarama 섬 Milliam 해안에서 낮은 조수의 영향으로 모래톱에 좌초되었으나, 배는 섬에 놔둔 채 112명의 선원들은 안전하게 "the Prince William Henry" 구조선에 의해 구조되었다.

 

그들은 지방민들에게 환영을 받았으며, 후에 프로비던스호의 기지인 마카오로 돌아 올 수 있었다. 같은 해, 좌초된 프로비던스호는 Naha항(오끼나와 남서부 위치)에 들어갔다.

 

 

 

정조21년 9월 6일 조선왕조실록

 

경상도 관찰사 이형원(李亨元)이 치계(馳啓)하기를, “이국(異國)의 배 1척이 동래(東萊) 용당포(龍塘浦) 앞바다에 표류해 이르렀습니다.
배 안의 50인이 모두 머리를 땋아 늘였는데, 어떤 사람은 뒤로 드리우고 머리에 백전립(白氈笠)을 썼으며, 어떤 사람은 등으로 전립을 묶어 매었는데 모양새가 우리나라의 전립(戰笠)과 같았습니다. 몸에는 석새[三升] 흑전의(黑氈衣)를 입었는데 모양새가 우리나라의 협수(挾袖)와 같았으며 속에는 홑바지를 입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코가 높고 눈이 파랗습니다. 역학(譯學)을 시켜 그 국호(國號) 및 표류해 오게 된 연유를 물었더니, 한어(漢語)·청어(淸語)·왜어(倭語)·몽고어(蒙古語)를 모두 알지 못하였습니다. 붓을 주어 쓰게 하였더니 모양새가 구름과 산과 같은 그림을 그려 알 수 없었습니다. 배의 길이는 18파(把)이고, 너비는 7파이며 좌우 아래에 삼목(杉木) 판대기를 대고 모두 동철(銅鐵) 조각을 깔아 튼튼하고 정밀하게 하였으므로 물방울 하나 스며들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하고,

 

삼도 통제사(三道統制使) 윤득규(尹得逵)가 치계하기를,
“동래 부사(東萊府使) 정상우(鄭尙愚)의 정문(呈文)에 ‘용당포에 달려가서 표류해 온 사람을 보았더니 코는 높고 눈은 푸른 것이 서양(西洋) 사람인 듯하였다. 또 그 배에 실은 물건을 보니 곧 유리병·천리경(千里鏡)·무공은전(無孔銀錢)으로 모두 서양 물산이었다.

언어와 말소리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고, 오직 「낭가사기(浪加沙其)」라는 네 글자가 나왔는데 이는 바로 왜어(倭語)로 장기도(長崎島)이니, 아마도 상선(商船)이 장기도부터 표류하여 이곳에 도착한 것 같다. 우리나라 사람을 대하여 손으로 대마도(對馬島) 근처를 가리키면서 입으로 바람을 내고 있는데, 이는 순풍을 기다리는 뜻인 듯하다.’하였습니다.”하니, 그들이 원하는 대로 순풍이 불면 떠나보내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정조21년 10월 4일 조선왕조실록

 

“전에 동래(東萊)에 표류해 온 배에 대해 어떤 사람은 이르기를 ‘아마도 아란타(阿蘭) 사람인 듯하다.’ 하였는데, 아란타는 어느 지방 오랑캐 이름인가?” 하니, 비변사 당상 이서구(李書九)가 아뢰기를, “효종조(孝宗朝)에도 일찍이 아란타의 배가 와서 정박한 일이 있었는데, 신이 어렴풋이 일찍이 동평위(東平尉)의 문견록(聞見錄)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
아란타는 곧 서남 지방 번이(蕃夷)의 무리로 중국의 판도(版圖)에 소속된 지가 또한 얼마 되지 않습니다. 《명사(明史)》에서는 하란(賀蘭)이라고 하였는데 요즘 이른바 대만(臺灣)이 바로 그곳입니다.” 하자,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주달한 바가 두루 흡족하니 참으로 재상은 독서한 사람을 써야 합니다.”

 

 

정약용의 "다산시문집"

 

동래부사의 말을 들으니 '그 선제(船制)가 개판(蓋板)이 있어 마치 우리나라의 거북선 "龜船"과 같았고, 개판 위로 창문을 내어 출입하도록 되었는데, 나사 모양의 사다리를 만들어 빙빙 돌아서 승강하였다.
좌우의 판 안에 여러 개의 방이 배열되어 있고, 그 판을 뚫어 창문을 만들었는데 모두 유리를 붙였으며, 배 안을 들여다보니 붉은 색의 칠이 황홀하였다. 개, 돼지, 오리 등의 가축을 기르는 곳도 이상스럽게 정결하였다.
또 한 곳을 보니 장창(長槍) 수백 자루를 쌓아놓았고, 사람마다 조창 하나씩을 차고 있었다.


그리고 배의 네 귀퉁이에는 모두 대포를 설치하였으며, 세 개의 돛대를 세웠는데 끊을 수도 있고 이을 수도 있어 그 장단(長短)을 마음대로 조절하게 하였다.
그들은 또 언덕 위에 소가 가는 것을 보고 두 손을 이마 위에 세워 소뿔의 형상을 하면서 달라고 요구해 왔으나 동래 사람들은 끝내 주지 않았다.' 하였다.
조창은 조그마한 것이 마치 필률(악기의 한 가지)과 같이 생겼는데, 화문(火門)을 돌로 장식하였으며 발사하면 불이 나간다. 그들은 이를 사용하는 솜씨가 매우 재빠르다.

 

[자료제공 : 한국범선모형동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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