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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면 하멜체류지 장승그러나 하멜보고서(표류기)가 일종의 미지급임금청구서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조선이나 일본에서의 행적을 객관적으로 서술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이는 하멜 일행 중 청나라사신에게 자신의 상황을 고변한 사건으로 인해 한양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진 남북산, 남이안에 관해서도 전혀 기록이 없는 점을 통해서는 확연히 알 수 있다.

 

즉 조선에서의 생활은 자신들이 청구한 미지급임금 결정에 중대한 영향을 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조선에서의 결혼과 자식들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만으로 하멜일행의 후손이 현존하고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이는 어디까지나 개연성일 뿐 확증은 없기 때문이다.

 

 

 

하멜이 표류한 당시의 조선은 효종 치세기이며, 중국은 청이 지배하고 있었다.
호란이후, 효종은 북벌이라는 그의 야망과 청국 및 일본에 대한 견제를 이유로 이들 표류자에게 식량을 제공하고 군사훈련에 참가시켰으며 이들이 신무기 제조기술을 제공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이들에게 조선식 이름까지 내려주었다. 그중에서 남북산이라는 이름이 효종 6년의 기록에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이 남북산은 네덜란드로 돌아가기 위해 청의 사신 행렬에 뛰어들었고 이후 감옥에서 병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이들 네덜란드인 문제로 곤란해진 조선 정부는 이들을 전라도 강진으로 이동시켰고 여기서 약 7년간 보내게 된다.
이후 다시 여수, 남원, 순천으로 분리수용이 결정되었다.

 

 

 

이전에 표류해 온 벨테브레가 박연이라는 조선명이 주어져서 조선여인과 결혼, 가정을 꾸리고 아들들(2명이상으로 추정)이 있었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정부는 이들을 본국으로 송환할 계획은 없었으며 이들이 정착하도록 돌봤다.
청나라 사신과의 소동이 없었다면 이들이 노출되는 일도, 한양에서 전라도로 이동되는 일도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자료제공 : 족보학전문연구소, “잔류인원 변동상황을 통해 본 하멜일행의 후손에 관한 고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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