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하멜정보관>하멜이 본 조선>조선의 문화

하멜은 원래 그의 보고서에 어떠한 경우에는 항목을 설정하여 언급하고 있으나, 어떠한 경우에는 항목을 설정하지 않고 조선의 여러 분야에 걸친 상황 및 문화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는 『하멜보고서』의 조선에 관련된 내용들을 언급한 곳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되는 내용을 조선의 문화로 통칭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주로 조선의 특산물과 관련된 농업과 광업, 언어와 문자, 계산법, 국왕의 행차와 청국 사신에 관련된 내용들인데 이들을 항목으로 설정하여 간단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이 나라는 필요한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다. 쌀과 기타 곡물을 비롯해 무명과 삼베도 풍부하며, 누에 도한 상당히 많이 치지만, 좋은 품질의 비단을 만들어 낼 직조 기술에 대한 지식이 발달되지 않았다.

  • 은, 철, 납 등이 산출되며, 호피나 인삼 뿌리 등 다른 많은 특산물이 생산된다.

  • 그곳(조선)에서 나는 특유한 한방약으로 질병을 치유할 수 있으나, 항간에는 그리 많이 통용되지 않는다. 의원들이 고관 밑에서 일하고 있어 치료비를 받고 사람들을 봐주지 못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 일반 백성들은 의사대신 장님이나 점쟁이를 찾아가며 그들이 충고해 준대로 따른다. 그곳이 산이나 강가, 절벽, 암초 또는 우상이 있는 절이던 가서 제사를 지내라는 충고를 따른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 와서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데, 그것은 1662년 왕명으로 이것들이 폐지되고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 이 나라 상인들이 사용하는 크기와 길이, 그리고 용적 단위에 대해 말하자면, 전국에 걸쳐 통일되어 있지만, 일반 백성들과 나쁜 상인들 사이에서는 도량을 속이는 것이 예사이며, 사는 사람들은 흔히 너무 가볍다느니, 너무 적다느니 주장하고 파는 사람은 너무 무겁다느니, 너무 많다느니 하며 승강이를 벌인다.

  • 많은 지방관들이 이를 엄중히 단속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제멋대로 자와 저울을 사용하기에 그런 행위를 근절시킬 방도가 없었다.

  • 이 나라에서는 저화라는 한 가지 지폐 이외에 다른 화폐는 유통되지 않으며, 그 지폐는 오직 중국과의 국경 지역에서만 통용된다.

  • 은 무게를 달아 유통되며, 크고 작은 막대 은이 있어 일본의 은과도 모양이 같다.

하멜은 조선에 저화라는 지폐 이외에 다른 화폐는 없었다고 하나 당시 조선에는 그 이외에도 많은 화폐들이 있었다.

 

[조선의 화폐 변천]

명 칭 발행년도 비 고
저 화
공양왕 3년(1391)
태종 원년(1401)
  1401년 司贍暑 설치
조선통보
해서(楷書)
세종 5년(1423)
  세종초 주전소 설치
팔분서(八分書)
인조 11년(1633)
  1636년 주조·유통 중단
전폐(箭幣)
세조 10년(1464)
 
십전통보(十錢通寶)
효종 2년(1651)
  1656년 유통 중단
상평통보(常平通寶)
단자전(單字錢)
숙종 4년(1678)
 
당이전(當二錢)
숙종 5년(1679)
  1697년 동전주조 중단
  1731년 동전주조 재개
중형전(中型錢)
영조 28년(1752)
 
당백전(當百錢)
고종 3년(1866)
  1867년 주조 중단
  1868년 유통 금지
당오전(當五錢)
고종 20년(1883)
  전환국 설치
  1894년 주조 종료
대동은전(大東銀錢)
고종 191년(882)
  1883년 제조 중단

 

특히, 하멜일행이 조선에 표착하기 2년 전인 1651년에는 십전통보(十錢通寶)라는 동전이 주조되고 있었다.

더군다나 효종 대에는 동전을 유통시키기 위한 많은 노력들이 있어 각 읍의 백성들이 동전 50문씩을 몸에 지니고 다니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동전 통용이 활발하지 못하여 1656에는 그 유통이 중단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조선에 당시 화폐가 없었다는 하멜의 말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며, 이 말을 다른 한편으로 이해할 때는 그만큼 다른 화폐의 유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기도 하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저화(楮貨), 조선통보(朝鮮通寶), 전폐(箭幣), 십전통보(十錢通寶), 상평통보(常平通寶) 등의 화폐가 있었으나, 하멜이 조선에 체재하고 있었을 당시에는 저화와 십전통보(十錢通寶)만이 유통되고 있었다.

 

 

  • 그 곳에 사는 짐승과 조류에 관해 보자면, 먼저 말과 소가 대표적이며, 황소는 거의 거세시키는 일이 없고, 집중적으로 사육된다.
  • 농촌사람들은 암소와 황소를 논밭을 가는데 이용하며, 여행자들과 상인들은 말을 이용하여 짐을 운반한다.
  • 그곳에는 호랑이가 흔하여 그 가죽을 중국과 일본으로 수출하며, 곰, 사슴, 야생 멧돼지와 가축으로 기르는 집돼지, 개, 여우, 고양이 이외에도 많은 짐승들이 있고, 뱀과 유독성 동물들도 많다. 백조, 거위 오리, 각종 날짐승, 황새, 백로, 학, 독수리, 까마귀, 뻐꾹새, 비둘기, 도요새, 꿩, 종달새, 피리새, 개똥지빠귀, 댕기물떼새, 말똥가리 기타 다양한 종류의 새들이 있으며, 수적으로도 풍부하다.

 

  • 그들의 언어와 문자에 대해 언급하자면, 먼저 그들의 언어는 다른 어떤 나라의 언어와 같지 않다.
  • 그들은 한 가지 사물을 여러 가지로 다르게 표현하기 때문에 배우기가 무척 어렵다.

  • 말할 때는 아주 점잖고 천천히 하며, 특히 고관이나 학자들이 그러하다.

  • 쓰는 대는 세 가지의 문자가 있다.

    우선 가장 중요한 문자는 중국, 일본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모든 책들은 다 이 문자로 인쇄되어 있고, 국가 공무에 관련된 소위 공문서에도 이 문자가 쓰인다.

  • 두 번째 문자는 우리나라의 흘림체와 같이 굉장히 빨리 내려 갈겨쓴다. 고관과 지방관들이 많이 사용하며, 판결문, 청원서의 결의문 및 그들끼리 서로 교환하는 서신을 이로 작성하며, 서민들은 이를 잘 읽지 못한다.

  • 세 번째라는 것이 제일 하급의 문자이며, 아녀자들과 서민들이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배우기가 아주 쉽고 그것으로 모든 사물을 다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생전 들어 보지 못한 이름도 아주 수월하게 그리고 앞에 말한 문자들보다 정확하게 음을 표시해낼 수 있다.

  • 이 문자들은 모두 으로 아주 능란하게 필사된다.

    그들은 필사되거나 인쇄된 역사문헌을 많이 보관하고 있고, 그것을 얼마나 소중하게 다루는지 왕의 형제나 왕자로 하여금 이를 늘 감독하도록 한다. 그 문헌의 사본과 인쇄판이 여러 도시와 성들에 나누어 보관되고 있는데, 화재 또는 다른 사고와 재해에 전부 분실되는 일을 막기 위함이다.

  • 그들의 달력과 그와 유사한 역서(曆書)들은 중국에서 만들도록 하는데, 그들로서 그것들을 충분히 만들 만한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 그들은 목판으로 인쇄하며, 종이 한 장 마다 따로따로 다른 책판을 새긴다.

  • 그들은 우리가 사용하는 계산대와 같은 긴 나무막대로 길이를 잰다.

  • 그들은 상업부기와 같은 기장 방식을 모르며, 무엇인가 사면 일단 그 전액을 적어 놓은 뒤 마지막에 가서 남은 총액을 다시 구입가에서 빼고, 얼마 남았는가 아니면 손해를 보았는가, 판단하는 정도이다.

 

여기서 하멜이 얼마나 조선의 사회 및 언어, 그리고 문화에 이르기까지 주도면밀하게 파악하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우선, 언어적인 면에서 본다면, 하멜은 조선에는 문자를 쓰는 방법이 3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그중에서 첫 번째의 문자로 모든 책들과 국가 공무에 관련된 공문서에도 쓰이는 문자가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한문이다. 또 두 번째로 휘갈겨 쓴 문자는 바로 인 한문의 초서 글자인 것이다. 당시 초서는 양반들이나 한자를 아는 사람들이 편지글에 많이 이용했던 것이다.
세 번째는 바로 현재까지 우리들이 쓰고 있는 한글로서 하멜은 한글의 효용성에 대해 굉장히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배우기에는 한자보다 한글이 더 쉬웠기 때문이며, 또 실제로 한글은 어떠한 발음이나 단어라도 그 음가를 제대로 표현해 줄 수 있는 문자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한글은 당시부터도 서민들을 위한 문자로서 또 많은 사람들에게 애용을 받으며, 현재에까지 한국의 불멸의 문자로서 존속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하멜이 『조선왕조실록』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조선시대 후기에는 임진왜란 이후 남았던 전주사고본의 실록을 근거로 다시 4개의 사고를 설치하여 보관하고 있었는데, 때때로 이관하기도 하였으며, 엄중히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멜이 말한 바와 같이 4곳에 분산해 두었던 것은 바로 이 사료가 조선의 제일가는 사료로서 소실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현재는 일제시대 때에 소실된 것을 제외하고, 태백산본과 정족산(鼎足山)본이 남아 있으며, 정상산(赤裳山)본은 1950년 한국전쟁 때에 북한으로 옮겨졌다고 알려져 있다.

 

 

  • 국왕이 궁전 밖으로 외출할 때는 모든 귀족들이 그를 수행한다.

  • 기병과 보병이 앞장서서 행진하며, 다들 화려한 정북으로 차려입고 기를 세우고 있으며, 여러 가지 악기로 연주한다.

  • 그 뒤에 국왕의 호위단 또는 친위대가 따르는데, 그들은 높은 지위의 서울 출신 양반들로 구성되어 있다.

  • 바로 그들 사이에 국왕이 금으로 세공된 작은 가마에 앉아서 들려간다. 그 순간은 사방이 조용해지며, 사람들의 숨소리, 말의 말굽 소리할 것 없이 모든 게 세세히 들릴 정도이다.

  • 국왕의 바로 앞에는 비서(승지)나 다른 신하 한 사람이 말을 타고 가며, 그의 손에는 자물쇠로 봉한 작은 상자가 하나 들려 있다.…이것은 상소함이다.

  • 어가 행렬이 통과하는 모든 거리의 양쪽은 완전히 차단되며, 아무도 문이나 창을 열어서도 안 되고 열어 놓아서도 안 된다. 더욱이 담벼락이나 울타리 너머로 기웃거리는 일은 더더욱 금지되어 있다.

  • 국왕이 관리들이나 병사들 앞을 지날 때도 역시 마찬가지여서 누구나 등을 돌린 채 서 있어야 하며 뒤를 돌아보거나 기침을 해서도 안 된다. 바로 그 이유로부터 대부분의 병사들이 마치 말에 재갈을 물리 듯 입에 작은 나뭇가지를 물고 있었다.

 

  • 청국의 사신이 오면 국왕이 친히 신하들을 이끌고 성 밖으로 영접을 나간다. 정중히 환영의 예를 취한 다음 사신을 모셔다가 숙소(태평관)에까지 직접 안내하도록 되어 있었다.

  • 또 온갖 풍악을 울리며, 무희와 곡예사들이 출동하여 사신 앞을 걸어가며 재롱을 피우면서 행렬이 진행된다. 그 때 그들 나라에서 만들어진 또는 발명된 고유의 많은 골동품들도 행렬 맨 앞에 전시되어 들려져 간다.

  • 사신이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그의 숙소와 왕궁 사이의 거리는 병사들에 의해 봉쇄되어지는데, 병사들은 10~12길(17~20m) 간격으로 늘어 서있다.

  • 두세 명의 병사는 중국사신의 숙소에서 보낸 편지를 연달아 중계하는 일만을 전담하고, 이로써 국왕은 시시각각 사신의 현황이 어떠한지 파악하고 있다.

  • 간단히 말해 사신을 깍듯이 존대하고 또 융숭히 환대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강구하는데 이는 중국 황제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 위함과 동시에 사신이 돌아가 그들 나라에 불평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나의위치:하멜정보관>하멜이 본 조선>조선의 문화 인쇄하기


카피라이트로고

이용안내 개인정보보호정책 홈페이지개선접수
뷰어프로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