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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대외관계, 나아가서는 국제관계에 대한 하멜의 평가인데, 주로 무역과, 주변세계의 상황 등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우선, 무역에 대해서 하멜은 조선 무역의 폐쇄성을 말하고 있었다.
즉, 조선에서 거래를 하는 유일한 민족은 쓰시마섬(=대마도)의 일본인들뿐인데, 그들은 남동해안에 있는 도시, 즉 부산에 무역거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하멜은 부산이라고 했지만, 실제는 부산의 왜관(倭館)이다.

 

무역품으로는 후추, 사향나무, 명반, 물소 뿔, 사슴과 가오리 가죽 등을 비롯하여 네덜란드와 중국인들이 일본으로 가져가는 여러 물건들을 다시 조선으로 가지고 가며, 다시 일본에서 인기가 좋은 물건들과 바꿔 오는 중개무역을 쓰시마가 행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조선인들은 북경과 중국 북부지방에까지 가서 약간의 교역을 하는데, 말을 타고 국경을 넘어야 하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든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거상이 아니면, 이를 감당할 수 없고, 무역을 위한 거래가 빨라야 3개월이라는 점도 언급하고 있다.

 

 

 

청국이 조선으로 침략하기 이전까지 조선은 부유하고 활기가 가득 찬 곳이었으나, 지금은 일본인과 청국인에게 많은 착취를 당하고 있어 흉년이 드는 해에는 그들에게 바쳐야하는 과중한 공물 부담으로 인해, 그 공물을 수송하는 차를 채우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이 부분은 분명히 하멜이 잘못 기술하고 있는 부분으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 의해 청국의 조공국이 되었기는 하지만, 이는 동아시아에서 탄력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조선의 국제정책이다.

 

왜냐하면 그 이전부터도 중국의 명 정부로부터도 조공국으로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조공책봉 체재 하에 편입되어 있다고 속국으로 보는 것은 역사적인 시각의 차이에서 발생한 하멜의 사견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일본에 많은 착취를 당하고 있다는 표현을 썼으나, 당시 조선과 일본의 외교관계는 대등 교린관계였으며, 어느 누구도 상대 국가를 속박하는 일은 없었다.

다만, 일본의 요청에 의해 1607년부터 “회답겸쇄환사” 및 “통신사”를 파견한 적이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조선과 일본 간의 선린우호에 의한 것이다. 통신사에 대한 양국의 의도가 조선은 일본의 정세탐정, 일본은 장군의 습직 축하 사절로 인식하고 있었기는 하나, 조선이 일본의 조공국으로 공물을 보낸 적은 없었다.

 

또 하나 일본의 요청에 통신사를 파견한 것은 쓰시마가 끊임없이 무역과 관련된 요청을 해와 그들과 일본 측을 회유하기 위한 조선의 전통적인 기미정책의 일환이기도 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한편, 하멜은 조선을 중심으로 주변세계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주로 북방지역에 있는 청국과의 외교관계, 하멜일행의 고국인 네덜란드, 또는 일본인들과의 관계되는 내용이다.
그 간략한 내용들을 살펴보겠다.

  • 그들이 알고 있는 나라 또는 왕국은 12개를 넘지 않으며, 그들 말에 따르면, 중국이 유일한 황제국이며, 나머지 나라는 이전에 중국에 공물을 바쳐야 했다고 한다. 지금은 다들 독립하였는데, 이유는 청국이 중국을 점령하면서 다른 나라는 손에 넣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 그들은 청국인을 가리켜 칙사(Tiekese)라고 하며, 그와 동시에 오랑캐(Oranckaij)라고도 부른다.

  • 우리나라는 남만국(Nampancoeck, 南蠻國)이라고 부르며, 이는 일본인들이 포르투갈을 지칭하던 명칭인데, 우리나라를 홀란드라고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 남만국이란 명칭은 원래 일본인들에게 배운 것이며, 특히 50~60년 전에 들여 온 그들에게는 마냥 생소하기만 했던 담배를 계기로 그들 사이에 퍼져 나가게 되었다. 그 보급과 재배는 일본인들에게서 배웠고, 그리고 일본인들이 애당초 그 씨가 남만국에서 전래된 것이라고 그들에게 알려준 탓에 아직도 담배를 흔히 남만초(Nampancoij, 南蠻草)라고 부른다.

  • 그들의 옛 문헌에 의하면 세계에는 84,000이나 되는 나라가 있다고는 하나 그것은 하나의 지어낸 이야기쯤으로 여기며, 태양이 하루 동안에 그 많은 나라를 다 비칠 수 없으니, 이는 필경 섬이나 절벽, 바위 등을 다 포함한 숫자라고 덧붙였다.

  • 우리가 그들에게 몇몇 나라의 이름을 대면 그건 어떤 도시나 마을 이름이 아니냐고 반격하면서 오히려 우리를 골려대곤 했는데, 그것은 그들 지도에 샴(Siam, 태국) 이상의 지역이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하멜은 조선에서 남만국이라는 용어의 유래와 담배의 관계를 상세히 취급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남만이라는 용어가 일본을 통해서 들어 왔을까?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멜에 의하면, 담배가 17세기를 전후해서 들어 왔다는 것은 남만이라는 용어도 그때를 전후해서 조선에 들어 왔다는 것이다. 또, 이전인 16세기 중엽 포르투갈인이 일본의 타네가시마(種子島)라는 곳에 표착해 왔을 때 일본을 통해 조선에 남만이라는 용어가 들어 왔다고 하더라도 실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이미 남만(南蠻)이라는 용어는 『태조실록』태조 1년 12월 16일조에도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문치(文治)가 이미 흡족하고 무위(武威)가 멀리까지 밝아져서, 부상(扶桑)의 도적이 진보(珍寶)를 받들고 와서 조회하고, 유구(琉球)와 남만(南蠻)이 이중으로 통역하여 들어와서 조공하였습니다.”라는 기록으로부터 이미 1392년부터 남만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유구(琉球)라는 것은 현재의 일본 오키나와 지역에 있던 왕국을 말하는 것이고, 남만이라는 것은 동남아시아 지역의 여러 국가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멜은 담배에 대하여 아주 상세히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주 흥미롭다.

  • 담배는 현재 그곳(=조선) 전국 각지에 걸쳐 아주 깊숙이 침투되어 있어 네다섯 살 난 아이들까지도 피우고 있는 실정이다. 또 지금 인 순간 성인의 경우에는 남녀를 막론하고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드물 정도가 되어 버렸다. 담배가 막 들어 온 초기에는 골통대 한 대에 은 한 돈 또는 그에 상당하는 값을 내야했다. 남만국은 따라서 그들에게 잘 알려진 나라 중의 하나가 되어 버렸다.

현재는 미성년자에 담배를 팔거나 흡입하는 것을 금지하고는 있지만, 당시에는 네 살 또는 다섯 살의 아이들까지도 담배를 피웠다고 하는 사실이다.
이것은 당시 담배가 사람의 몸에 좋다는 말가지 돌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학자인 이수광은 그 상황을 1614년에 저술한 『지봉유설』에서 “지금 사람들은 담배를 많이 심는다.”라고 적고 있었으며, 그대부터 담배 소비는 늘어났고, 담배를 재배하는 농가도 늘어났다.

 

또 담배는 농가에서 재배하는 수입 농경작물이기도 했다. 풍기군수였던 고상안(高尙顔)이 1619년에 지은 『농가월령』에는 경상도 지방에서 담배씨를 뿌리는 것을 묘사할 정도로 널리 행해졌던 것이다.

 

그리고 『인조실록』의 내용 중에는 담배와 관련된 몇몇 기사들이 보이고 있는데, 특히 인조 16년 8월 갑오조의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내용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 몰래 담배(南靈草)를 심양(瀋陽)에 들여보냈다가 청나라 장수에게 발각되어 크게 힐책을 당하였다.
담배는 일본에서 생산되는 풀인데 그 잎이 큰 것은 7, 8촌(寸)쯤 된다. 가늘게 썰어 대나무 통에 담거나 혹은 은(銀)이나 주석으로 통을 만들어 담아서 불을 붙여 빨아들이는데, 맛은 쓰고 맵다.
가래를 치료하고 소화를 시킨다고 하는데, 오래 피우면 가끔 간(肝)의 기운을 손상시켜 눈을 어둡게 한다. 이 풀은 병진·정사년 간부터 바다를 건너 들어와 피우는 자가 있었으나 많지 않았는데, 신유·임술년 이래로는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어 손님을 대하면 번번이 차와 술을 담배로 대신하기 때문에 혹은 연다(煙茶)라고 하고 혹은 연주(煙酒)라고도 하였고, 심지어는 종자를 받아서 서로 교역(交易)까지 하였다.
오래 피운 자가 유해무익한 것을 알고 끊으려고 하여도 끝내 끊지 못하니, 세상에서 요망한 풀이라고 일컬었다. 심양으로 굴러 들어가자 심양 사람들도 또한 매우 좋아하였는데, 오랑캐 한(汗)은 토산물(土産物)이 아니라서 재물을 소모시킨다고 하여 명령을 내려 엄금했다고 한다.

 

이 기록은 1638년의 기록인데, 초기에 담배는 가래를 치료하고 소화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많이 애용이 되었음을 알 수 있고, 또 그와 함께 담배의 독성에 대해서도 조선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담배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있어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인조실록』인조 18년 4월 경오조에 의하면, 담배 밀무역으로까지 퍼져나가 조선 정부를 담배에 대한 밀무역을 금지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을 볼 때, 17세기를 전후하여 조선에 담배가 전래된 것은 사실이며, 하멜이 네 다섯 살 어린아이까지 피고 있을 정도였다고 묘사한 것은 당시의 현실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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