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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한국인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사실들이지만, 자식은 누구나 돌아가신 부친을 위해 3년을, 모친을 위해서는 2년을 복상해야 한다는 것을 시작으로, 승려들과 같은 식의 식사를 해야 하고, 관직에도 나가면 안 된다고 언급하고 있다.

 

과연 이러한 것이 당시의 조선사회에서 양반들을 제외하고 얼마나 지켜지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나, 실제로 서양이국인이었던 하멜이 이러한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조선에 체재하고 있었을 당시 주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장례 관습을 지켰다는 것을 의미하는 반증이기도 하다.

 

 

  • 고위 관리이건 하급 관리이건 부모가 죽게 되면 즉시 사직해야 한다.

  • 상중에는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 해서도 안 되며, 설령 그 기간 중에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들은 사생아 취급을 받는다.

  • 말다툼이나 싸움은 물론, 음주도 삼가야 한다. 삼베 천으로 만든 긴 두루마리를 입으며, 그 상복에는 밑단도 없이 빨지 도 않은 채로 걸치고 다닌다.

  • 허리에는 배의 밧줄 같이 꼬아 만든 삼베 띠를 감는데 장정의 팔뚝만한 두께이다. 머리에는 대나무 모자를 쓰고, .....손에는 꿁은 지팡이나 대나무 막대기를 쥐는데, 이를 보고 부모 중 어느 분이 돌아가셨는지를 알 수 있다. 즉 대나무는 부친, 지팡이는 모친을 의미한다.

  • (상중에 있는 사람은) 세수를 하거나 몸을 씻는 일도 드물어서 사람이라기보다는 허수아비에 가까운 형상이다. 누가 죽게 되면 친척들이 광인처럼 거리를 돌아다니며, 울고 통곡하고, 머리카락을 쥐어뜯기도 한다.

  • 시신매장할 때는 각별한 신경을 점쟁이들이 지적해 준 산 중턱에 물이 들지 않는 묘 자리를 골라 두께가 엄지손가락 두세 개는 되는 이중 관속에 넣어 매장한다.

  • 에는 각자의 재산에 따라 새 옷이나 다른 물건들로 채워진다.

  • 매장은 보통 봄이나 가을 추수가 끝난 뒤에 실시하는데, 여름에 죽은 사람은 기둥 위에 세워진 작은 볏짚 움막 속에 안치되었다가 매장하고 싶을 때 다시 집으로 모셔와 옷과 물건 등을 넣은 관속으로 옮겨진다.

  • 다음 날 동이 트면 상여가 나가는데, 그 전날 밤은 유쾌하게 지낸다. 상여꾼들은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데, 그 반대로 친척들은 울고불고 곡을 하면서 관 뒤를 따라간다.

  • 장례 후 사흘 재 되는 날에 제물을 바친 제사를 지내고 다시 즐거운 하루를 보낸다.

  • 무덤은 보통 4~6발자국 높이로 흙을 올려 아주 근사하고 완벽하게 손질한다. 고관들의 묘지앞에는 돌들(비석)과 돌로 만든 조각 석상들이 많이 서있는데, 돌에는 고인의 성명, 집안의 내력, 생전의 직위 등이 새겨진다.

  • 3년마다 1년을 13개월로 계산하는 그들 방식의 8월 15일(추석)에는 언제나 벌초를 하고 햅쌀밥으로 차례를 지낸다. 이것은 설날과 함께 그들에게 가장 큰 명절이다.

  • (조선에는) 점쟁이 혹은 마술쟁이(=무당) 등이 있으나,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고인들이 편히 눈을 감았는지, 좋은 자리에 묻혔는지 등을 점치며,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 준다. 대로는 두세 번 이장하는 경우도 있다.

  • 부모들을 명당에 모시고, 또 그 나라에는 한도 끝도 없이 많은 장례와 관련된 지켜야할 절차를 다 끝내고 난 후에 그 집안의 장자가 부모님의 집과 거기에 딸린 일제의 물건을 소유한다.
    토지와 나머지 재물은 다른 형제들과 나눈다. 딸이 조금이라도 유산의 일부를 가졌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 그처럼 여자들은 단지 옷가지와 혼인할 때 몸에 소지하고 온 물건 이외에는 소유할 권리가 없음.

  • 부모가 80세가 되면 그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어야 되는데, 노인들은 재산관리 능력이 약화되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노부모를 변함없이 공경한다.

대체로 당시 조선시대 장례풍습에 적합한 설명을 취하고 있으며, 특히, 마지막 부분의 여자에 대한 재산 상속문제는 당시의 사회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원래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는 여자도 균등하게 재산을 상속받을 권리가 있었다. 즉, 재산을 장자, 차자, 남녀에 상관없이 골고루 나누어 주는 “균분”이었다.
노비의 수, 토지의 비옥도까지 하나하나 따져서 정확하게 골고루 나누는 것이 관행이었다.

 

또 재산 상속은 제사와 깊은 연관성를 가지고 있었는데, 비용 문제 때문에 상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윤회봉사”라고 하여 딸을 포함한 자식들 간에 순서를 정한 후 순번대로 제사를 돌려가며 모시는 방식이 존재했던 것이다.

 

하지만, 주로 장남인 경우나 특정인 한 사람에게 고정시켜 제사를 모시도록 하는 “분할봉사”도 있었는데, 조선후기 분할봉사로 변환되어 갔다.

때문에 유교윤리가 정착된 조선후기로 내려오면서 대를 잇기 위한 양자를 세우는 사회 관행이 있었고, 표면적으로는 균등하게 나누어 주는 균분을 표방하면서도 실질적으로 봉사자(제사를 모시는 사람), 즉 장자나 장손을 우대하는 과도기적 단계를 거치면서 출가외인(出嫁外人)으로 차별받는 상속이 이루어졌다.
‘딸자식은 다른 고장에 살아 선대 제사를 모시기 어려우니 재산을 감해준다’라는 딸을 차별하는 의식이 발생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현상의 결과론적인 입장을 하멜은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전기에는 결혼해도 여자가 친정으로부터 가져온 재산은 장부상 그 몫이 달랐고, 그 재산 처분권도 여자에게 있었으며, 여자(어머니)의 재산을 상속할 경우 반드시 어머니의 동의가 있어야 했고, 재산권 권리 행사의 주체로서 부부가 나란히 서명하고 있어 여자의 재산이 인정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예를 들어 여자가 자녀 없이 일찍 죽으면 여자의 재산은 친정으로 돌려보냈고, 남편이 재혼하는 경우도 여자의 재산을 친정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조선시대 전기까지의 법이고 관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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