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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사실을 조선인과 일본인이 안남(安南, 베트남)표착한 예로 규명해보자.
안남(安南)에 표착한 조선인이 중국이라는 제3국을 경유해 조선에 송환된 경우는 「김대황표해일록(金大璜漂海日錄)」

(『지영록(地瀛錄)』)에 기록되어있는데, 그 개략을 보면 다음과 같다.

 

1687년 제주의 진무(鎭撫)였던 김대황(金大璜) 등 24명은 3필의 진상마를 이송하기 위해 제주도를 출발했는데, 폭풍에 휘말려 약 1개월간 표류한 끝에 안남에 표착했다. 표착 후, 안남의 수도에 이송되었는데, 그곳에서 안남 국왕의 허가를 얻어 다시 회안부(會安府)를 향하였고, 거기서 수 개월간 체재하게 되었다.
국왕에게 몇 번인가의 송환 요청을 한 끝에 일본으로 향하는 상선에 기탁하여 귀국할 것을 허락받았는데, 일본 상선이 이들에 대한 송환을 거부했기 때문에 복건(福建)으로 행하는 상선에 승선시켜 북경으로 보낼 것이 명해졌다.

 

그런데, 복건의 또 다른 선주가 조선까지의 선박비를 지불한다면, 조선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하였기에 그 선박을 타고 정해현(定海縣) 보타산(普陀山)의 항구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제주도 서귀포까지 돌아온 것이다. 그 복건의 선주는 진건(陳建)과 주한원(朱漢源)이었는데, 『지영록』에 수록된 「진건주한원등문답(陳建朱漢源等問答)」에 의하면, 조선 정부는 그들에게 조선 표류민을 송환시켜준 답례로 은 2,556냥을 주었고, 육로를 이용하여 북경으로 귀국시켰다.

 

이 사례로부터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안남과 중국(=청국) 사이에 국제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김대황 등의 표류민은 조선으로 귀국하는 것이 가능했다.
우연하게도 중국인 진건과 주한원에 의해 송환되기는 하였으나, 그것조차도 안남과 중국 사이에 국제관계가 없었다면 성사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안남 국왕의 본래 의도대로라면 제3국인 일본 경유의 송환이었는데, 그것도 역시 제삼국인 중국의 북경 경유로 변경되었고, 그러한 제3국 경유 송환 과정 중, 우연한 기회에 의해 복건의 중국인 선주에 의해서 조선으로 귀국하게 된 것이다.

 

 

 

한편, 「오인안남국표류기(奧人安南國漂流記)」〔가등귀교정(加藤貴校訂)『표류기담집성(漂流奇談集成)』國書刊行會〕, 1990에 의하면, 1765년 12월에 안남에 표착한 일본 표류민도 김대황과 거의 같은 경우로 제3국(중국)을 경유해서 일본으로 송환되고 있었다.

 

강풍으로 인해 안남의 북부에 있는 마이치바라는 곳에 도착하여 약 2개월간을 체재한 후에 중국인 코크쿠와인을 만나 그의 조언으로 회안(會安)으로 향하였다. 회안에서 우연히도 같은 일본인 표류민과 만나 그들과 합류하게 되었다. 1767년 2월, 그때까지 생존하고 있던 두 선박의 7명은 이들을 일본으로 귀국시켜주겠다는 통타이쿤의 남경선(南京船)에 옮겨 타고, 약 3개월 정도의 선상생활을 거친 후에 5월에 나가사키에 도착하였다.

 

김대황과 마찬가지로중국인 선주가 스스로 일본 표류민을 귀국시켜주겠다고 말하고 있으며, 표류민 송환에 임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러한 선주들을 “표류민 송환체제” 속에서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에 대해 현재로서는 명확히 규명할 수 없지만, 표류민을 송환시킴으로서 그 어떠한 형태로든 이익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하는 추측을 해본다. 그러나 안남에 중국선이 빈번하게 출입할 수 있는 국제관계 없이는 일본 표류민들의 송환 역시 불가능한 것이었다.

 

유명한 사건이기는 하지만, 일본『달단표류기』에 보이는 일본인의 송환 케이스도 제3국 경유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1644년, 연해주에 표착한 일본의 어민들이 표착하자마자 여진족에게 습격을 당해 거의 반수 이상이 살해당하는데, 살아남은 15명은 중국(청국)의 지방 관리에게 보호되어 북경으로 이송되어졌다.

그 후, 북경에서 조선으로 이송되어 왜관→쓰시마번(對馬藩)을 거쳐 일본으로 송환되었는데, 1644년은 시기적으로 명· 청교체기로서 아직 청국이 중국 전토를 장악하지는 못했지만, 북경을 장악하여 안정기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또한, 조선은 1627년과 1636년에 두 차례에 걸친 청의 침략을 받고 있었으며, 그 후에는 책봉관계를 맺고 있었다. 즉, 청과 조선의 국제관계가 성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선을 통해서 일본으로의 송환이 가능했던 것이다.

 

 

 

정동유(鄭東愈)의 『주영편』을 보면, 1801년에 제주도의 당포(唐浦)에 대형 선박이 표착하였는데, 표착 후 그 선박은 남방의 흑인 5명을 하선시켜 놓은 채 도주한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고병익씨는 「南蠻黑人의 濟州漂着」(『東亞交涉史의 硏究』서울대학교출판부, 1970)에서 대형 선박은 포르투갈선으로 표착한 5명은 마카오에 살고 있던 흑인 노예일 것이라고 한다.

조선 정부는 이들에 대한 해결책으로, 중국에 사신을 파견할 때, 흑인 표류민을 동반시켜 중국(북경) 경유로 본국에 송환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 5명이 북경에 사신과 함께 도착하기는 하였으나, 중국정부는 “그들이 어느 나라의 사람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돌려보낼 도리(道里)가 없다.”라는 이유로 표류민에 대한 인수를 거부하였다.
조선은 어쩔 수없이 그들을 조선에 다시 이송시키게 되는데, 그들이 처음에 표착한 장소, 즉 제주도로 돌려보내게 하였다.

 

그 후, 그들 중에서 2명은 사망하고 3명은 생존해 있었다고 『주영편』에는 기록되어 있다. 결국, 그들 5명의 흑인 표류민은 송환되지 못한 채 조선에서 일생을 마치고 만 것이다.

 

여기에서 그들이 송환되지 못한 이유가 중국과 표류민(5명의 흑인)의 본국 사이에 국제관계가 존재하고 있지 않았다는 점(=중국과 표류민 자국과의 국제관계가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 당시에 네덜란드와 일본 사이에 국제관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수가 거부된 이유는 조선과 일본간에 “표류민 송환체제”가 아직 정립되어 있지 않았으며, 네덜란드와 일본 간에도 양국의 “표류민 송환체제”가 정비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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