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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선으로부터 지급된 것은 『나가사키 상관일지(Dagregister Nagasaki)』(1668. 14 Augustus)에 의하면, 의복과 10근의 쌀, 2매의 옷감, 그리고 이외의 소용되는 물건들이었다.

 

이를 통해 잔류인의 일본송환이 당시 조선과 일본 사이에 표류민 송환 때에 행하고 있던 표류민 구제제도의 틀 속에서 행해지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들이 경상도 차사원과 대면한 것은 1668년 4월11일로서 곧 동래부에 넘겨질 것이며, 아직 조정에서의 서계가 도착하고 있지 않아 그 도착을 기다린 후, 서계와 함께 인도할 것이라는 내용이 『접대왜인사례』현종9년 4월11일조에 보이고 있어 그들의 동래부 이송을 확인할 수 있다.

 

드디어 예조판서와 예조참의의 서계는 동래부에 도착하게 되는데, 『본방조선왕복서』권23에 수록되어 있는 예조참판 조한영의 서계에는 재미있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네덜란드인에 관해서는 이미 이전의 서계에서 상세히 하였다. 정말로 그들이 표도한 당초에는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알 수 없었고, 그 귀로도 또한 알 수가 없었다.
처지를 불쌍히 여겨 남변(南邊)에 처하게 하고, 생업에 안정토록 하여 하루라도 도망치려는 기색은 없었다. 귀국 지방에 흘러들어 간 그들은 여기(조선)에 속해 오래 머물러 있어 우리의 백성과 같다.
그 린호(隣好)가 있어, 돌려보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귀국의)서계에서 말하기를, 이들은(네덜란드인) 이전부터 귀방(貴邦)에 내향(來享)하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과연 그러하다면, 조정의 협력 방침으로서 어찌 난제(難題)를 말하여 근간지의(勤懇之意, 성심의 뜻)를 거슬리게 하겠는가. 만약, 또 다시 배를 보내는 일이 있다면, 본국으로 생환시키는 것 또한 좋은 일이다.
그 중에 한 명이 작년에 사망하여 생존자는 7명인데, 체재하고 있는 곳에 명을 내려 사신(=差倭)에게 보내도록 하겠다.

 

이 서계의 내용은 조선이 네덜란드인 억류하고 있었던 것에 대한 조선정부의 입장을 표명한 것이지만, 일본의 송환요청에 쾌히 승낙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라도분치한 것은 일행 두 명이 청국 사신 앞에서 소동을 일으킨 사건으로 인해 청과의 외교문제 발생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잔류 네덜란드인의 인수와 관련해, 하멜 등 8명이 탈출하여 본국으로 돌아간 후, 그 일행 중의 두 명과 대담을 나눈 당시의 저명한 니콜라스 위츤(Nicolaas Witsen)은 『북방과 동쪽의 타르타리안(Noord en Oost Tartaryen)』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1653년 주민에 의해 무세라고 불리는 켈파르트(제주도) 섬에 수명의 네덜란드인이 야하트선 스페르붸르호로 난파를 당해 일본에 탈출하기까지 13년이라는 장기간을 코레아와 이 섬에 붙잡혀 있었다.
남은 사람들은 동인도회사의 요청을 받은 일본의 황제의 중계에 의해 그곳에(조선에) 남을 것을 희망한 한 사람을 제외하고 나중에 석방되었다. 그는 그 곳(조선)에서 결혼하여, 크리스트교도 내지는 네덜란드인으로 정말 볼 수 없었다. 그들 중에 일부분은 그 곳(조선)에서 결혼한 처자를 남겨두고 돌아왔다.

 

이 기록에 의하면, 『본방조선왕복서』권23의 「위아란타인재견사답(爲阿蘭?人再遣使答)」에 보이는 바와 같이 한 명이 사망한 것이 아니라, 잔류 네덜란드인의 일본 송환 때에 스스로가 자청하여 조선에 남을 것을 희망하였고, 일본으로의 송환(=본국송환)을 거부했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그 한 명은 누구인가.
『하멜보고서』와 그 외의 네덜란드 측의 기록에는 잔류 네덜란드인 7명의 명부가 명확히 기록되어 있는데(「Missiven Nagasaki naar Batavia」25 Oct. 1668), 하멜 일행이 나가사키 부교의 심문에 답한 조선 잔류 네덜란인 8명의 명부를 비교해 보면, 사망자가 요리사 양 크라스젠(Jan Claeszen)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인 학자 이쿠타 시게루(生田滋)씨는 『조선유수기(朝鮮幽囚記)』에서 한 명의 조선 잔류설을 인정하고 있으며, 네덜란드의 연구자 호붸(H.J. van Hove)씨도 그의 저서 『Hollanders in korea』(Het Spectrum BV, 1989)에서 잔류설을 인정하고 있다.

 

특히 호붸씨는 일본의 송환요청으로 곤란한 상황에 빠지지 않기 위해 잔류 희망자인 양 크라스젠이 사망했다고 했어야 했으며, 송환된 동료 7명도 송환되지 못할 위험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조선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송환이 결정된 네덜란드인의 조선 잔류는 또 다른 형태로서 일본의 외교적 개입의 조선에 대한 외교 간섭을 초래할 위험성이 있었는데,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려는 조선 정부가 단지 한 명의 네덜란드인에 대한 잔류 희망을 허가했다고 생각하기도 힘들다.

더구나 조선 측의 기록에는 잔류를 희망했다고 하는 인물에 대한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그 반면에 조선이 일본에 보낸 서계와 일본 측의 기록으로 사망은 명확해진다.
즉, 「아란타인조선강표착지일건」에 의하면 일행 중 사망한 한 명의 시체에 대한 처리로서 소금에 절여 상하지 않도록 하여 네덜란드인이 승선할 때, 같이 넘겨받도록 지시가 내려지고 있는 것으로부터 알 수 있다.
더욱이 “아란타인 8명중에서 그 중의 한 명이 작년 11월9일에 병사(病死)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으며, 이는 잔류 네덜란드인들이 말한 것으로 사망한 정확한 날짜, 즉 11월9일 병사했다고까지 기록하고 있다.
즉, 한 명이 조선에 남기를 희망했다는 것은 위츤의 잘못된 기록이거나, 위츤과 대담한 두 명의 네덜란드인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한편, 『변례집요(邊例集要)』권17, 잡조(雜條)의 기록에는 “차왜 평성목(平成睦)이 하선연(下船宴)을 행할 때 말하기를, “만인 8~9명이 귀국에 잔류하고 있다는 것은 에도(=막부)에서도 알고 있는 바이다. 지금 만약에 7명을 이끌고 돌아간다면, 에도(=막부)는 반드시 의심할 것이다. 사망한 자의 시신을 싣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시신이라도 가지고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이미 송환요청 이전에 쓰시마번에서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준비하고 있었던 대응책임을 확인할 수 있다.
사망자에 대해서는 그 시체를 잘못 보관하여 손상되었고, 형체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라는 내용도 「아란타인조선강표착지일건」에 보이고 있는데, 결국 조선 측이 의해 시체를 관에 넣지도 않은 채 땅에 묻히게 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결국 쓰시마 측도 이를 어쩔 수없이 인정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연구에서 확실하게 언급을 회피해왔던 한 명의 네덜란드인의 “조선잔류설”은 잘못된 것이며, 사망한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

 

 

 

하지만, 그것은 조일간의 송환교섭에 어떤 문제가 있어 연체되었던 것이 아니라, 왜관을 출발할 당시 계속되는 강한 남풍의 영향으로 송환선의 돛대가 부러져 버렸기 때문에 약 2개월간 조선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는 『나가사키 상관일지(Dagregister Nagasaki)』의 1668년 8월14일의 기록으로 명확해진다.

 

조선의 기록에는 잔류 네덜란드인들의 조선 출발 시기에 대해 『접왜사목록초』현종9년조에는 단지 음력으로 6월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으나, 일본 측의 기록 「아란타인조선강표착지일건」에는 1668년 6월18일(양력 1668년 7월 26일) 무사히 도착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어, 조선에서 출발한 것이 음력으로 1668년 6월17(양력 7월 25일)일 내지는 18일(양력 7월 26일)임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조선을 출발할 당시 네덜란드인들은 왜관에 있는 하선(荷船, 일종의 화물선) 중에서 가볍고 튼튼한 배에 요코메 사무라이(橫目侍, 감시역의 무사)와 함께 승선하였고, 선상에서는 어느 정도의 자유가 부여되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쓰시마번에 도착한 그들은 송수헌(松水軒)에 머무르면서 나가사키에 이송할 준비를 하였다.
또한, 6월27일(양력으로 8월4일)에는 그들에게 음식물과 조선의 청동 14관문과 백포 24필, 그리고 면이 들어간 의복 한 벌씩을 지급하였다.

 

『나가사키 상관일지(Dagregister Nagasaki)』의 1668년 8월14일의 기록에도 잔류 네덜란드인들도 쓰시마번이 자신들이 나가사키에 도착할 때까지의 음식물과 의복을 제공해 주었다고 언급한 내용이 보이고 있다.

 

물론 이들은 조선을 출발할 때 조선정부로부터도 의복, 쌀, 포 등을 지급 받고 있었는데, 조선에 표착한 일본인들이 쓰시마를 거쳐 나가사키에 송환된 경우와 비교해 볼 때 거의 마찬가지의 대우를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들의 일본송환이 결정된 후부터, 그들은 조일간의 표류민과 같은 입장에 있었던 것이며, 송환될 때에도 “표류민 송환체제” 또는 “표류민 구제체제”의 틀 속에서 그 송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측의 자료인 『통항일람(通航一覽)』권3에도 악천후로 인해 8월10일에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부교 마쯔다이라 진자부로(松平甚三郞) 앞으로 보내졌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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