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하멜정보관>외교관계>잔류인 송환교섭 전개

데지마 상관도하멜 일행은 9월14일 나가사키 부교 마쓰다이라 진자부로(松平甚三郞)의 심문을 받은 뒤, 네덜란드 상관이 있던 데지마로 이송되었는데, 또 다시 10월25일에 다시 두 명의 나가사키 부교, 즉 마쯔다이라 진자부로와 코노 곤에몬(河野權右衛門)의 심문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1차 심문 조사의 확인과 같은 것이었다.

 

 

 

 

 

「아란타인조선강표착지일건」에 의하면, 쓰시마번은 막부로부터 조선 잔류 네덜란드인의 송환명령을 받자, 즉시 조선에 파견할 차왜를 선정하여 히사와 타로사에몬(久和太郞左衛門)에게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한편으로 네덜란드인 송환요청에 대해, 잔류 네덜란드인들이 달갑지 않게 여기거나, 또는 조선 측이 받아들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도 가지고 있었다.

 

아란타인은 별다른 일없이 조선으로부터 인도되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아란타인은 조선에서 겨우 사냥 등을 하며, 적절치 못한 환경에 있었기 때문에 조선을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위의 8명이 일본에 인도되어도 위와 같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조선으로부터의 인도가 어떠한 이유로든 문제가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조선이)살해하고 나서 사망했다고 말할지도 모르고, 병사했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는 사체 등에 대해서도 주의 깊게 인도 받도록 지시할 것이며, 문제 발생의 상황을 타로사에몬(太郞左衛門)으로 하여금 반드시 상세하게 보고하도록 명령하라는 것이 쓰시마번주의 생각이다.

 

즉, 조선정부가 네덜란드인을 적절치 못한 환경에 두고 있어 네덜란드인들은 조선을 달갑게 여기지 않을 것이므로 그들의 일본송환을 조선 측이 문제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문제의 내용이라는 것은 조선정부가 잔류네덜란드인을 살해하고 나서 사망 내지는 병사했다고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만약에 그러할 시에는 대응책으로 네덜란드인의 시체조차도 넘겨받으라고 지시한 것이다.

 

 

 

한편, 조선과 일본 간에 네덜란드인의 탈출사건과 이에 대한 문의 교섭이 이루어지고 있는 사이, 나가사키 네덜란드 상관에서는 조선에 잔류(=억류)되어 있는 8명구제문제가 대두되었다.

이는 당시 네덜란드 상관장이었던 다니엘 식스(Diniel Six)가 에도참부 중에 조선 잔류자의 구출을 요청하고 있었고, 일본인 통역을 통해 나가사키 부교에게 그들의 구출 요청에 관한 편지를 보내고 있었던 것(Dagregister Japan, 1667. 14 April)으로부터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구제문제는 네덜란드 측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 측에서도 그들을 위한 구제, 즉 송환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당시의 나가사키 부교 마쯔다이라 진자부로(松平甚三郞)가 잔류 네덜란드인의 구제문제를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가 에도 재중의 부교에게 구제에 관한 편지를 보내고 있는 것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Dagregister Japan, 1667. 17 Februaril)

 

물론, 네덜란드인 송환이 막부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네덜란드 상관장과 나가사키 부교의 송환을 위한 행동들이 막부에 크나큰 영향을 주고 있었음은 부정할 수는 없다.

 

 

 

즉, 『접왜사목록초』현종9년 2월조에 의하면, 동래부는 왜관의 일본인으로부터 네덜란드인에 관한 교섭을 위해 히사와 타로사에몬(久和太郞左衛門, 平成睦)가 올 예정이며, 이미 그 사자가 에도로부터 쓰시마에 도착해 있다는 정보입수한 것이다.
그 내용은 즉시 조정에 보고되었고, 비변사는 나중의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이와 관련된 조사와 보고를 동래부에 명하고 있었다. 조선 측은 이번의 일본교섭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송환교섭을 위한 차왜가 예조참판, 예조참의, 동래부사·부산첨사 앞으로의 서계를 지참하고 조선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본방조선왕복서』권23에 수록되어 있는 「위아란타표인재차단개서」라는 예조참판 앞으로 보낸 서계를 보기로 한다.

 

.....이전 만박에 관해 치문했는데, 회신에 쓰인 내용을 보고 그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지금 에도에 있으며, 집정(老中)을 통해서 대군(將軍)에게 보고하였다.
이것에 대해 집정은 우리들에게 그 뜻을 전해주었다. 고토에 표착한 자들은 아란타국(阿蘭陀國)의 만종(蠻種)으로 귀국이 억류하고 있는 자들과 동류라고 듣고 있다.
그 만민은 오랫동안 본방(本邦, 일본)에 내공(來貢)해온 자들이다. 때문에 그들 생존자 8명을 폐주(蔽州, 쓰시마)에 호송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 정관 평성목(平成睦)과 도선주 원조충(源調忠)을 파견하여 정중하게 요청하는 바이다.

 

쓰시마번은 어디까지나 대군의 명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면서 조선 잔류 네덜란드인에 대한 송환을 정중하게 요청하고 있다.
한편, 내용 중에는 네덜란드는 일본 오랫동안 내공(來貢)해왔다고 강조하면서 송환요청의 정당성을 구하고 있는 부분이 보이고 있다.

 

이는 예조참에게 보낸 서계에도 “그들 만민은 본방에 오랫동안 내공(來貢)해 온 자들이므로 8명의 생존자는 루읍(陋邑, 쓰시마)에 호송되어야 하며, 이는 양국의 수호를 돈독케 하는 것이다.” 라고 네덜란드가 내공국(來貢國=조공국)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막부가 네덜란드인에 대해서 “내공(來貢)”하는 자들이라고 본 것이 아니라, 쓰시마번이 송환요청의 정당성을 부여하여, 송환교섭을 달성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문구였다.

 

왜냐하면, 탈출 사건의 문의 결과, 조선 잔류 네덜란드인들이 그리스도교가 아니라는 것이 명확해 졌고, 또 한편으로는 송환교섭과 관련된 서계 작성에 원래의 취지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서계의 작성도 쓰시마가 의도대로 가능하다는 것을 막부가 용인했기 때문이다.

 

이는 송환요청과 관련해 동래부사·부산첨사 앞으로 보낸 서계에서 명확해 진다. 즉, 『본방조선왕복서』권23의 서계에 “그들 만민(蠻民) 8명은 또한 일반인이다.” 라는 문구가 보이고 있어 이미 그들은 그리스도교라는 의혹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에 대해 조선은 송환교섭에 관련된 쓰시마의 교섭을 빨리 마무리 짖기 위해, 요청에 따라 네덜란드인 인도를 결정하였다.

 

즉, 1668년 4월3일, 현종이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을 때, 예조참판 조복양이 “지금 이 만인들을 끝내 보내지 않을 수가 없으니, 입고 있는 의복을 당연히 만들어 주어 보내야 합니다.” 라고 하였고, 영의정 정태화는 “남원은 그들이 지나가는 길이므로 남원을 집결지로 정해 본도(本道=전라도)에 의복을 만들어 주라는 명을 내리고, 또한 차사원을 정해 전라도 차사원이 경상도 차사원에게 인계하고, 이로써 왜관에 넘겨주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진언하여 현종의 허가를 받은 것이다(『비변사등록』현종9년 4월 4일조).

 

 

 

하멜 일행은 일본으로 탈출하기 이전부터, 서울에서의 탈출 사건을 일으켜 청국과의 외교문제를 초래했다.

더구나 그들의 탈출로 인해 일본으로부터는 이와 관련된 각종 문의와 요청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네덜란드인은 불편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의위치:하멜정보관>외교관계>잔류인 송환교섭 전개 인쇄하기


카피라이트로고

이용안내 개인정보보호정책 홈페이지개선접수
뷰어프로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