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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귤성진(橘成陳)의 정보에 의해 하멜 일행의 탈출사건을 알고 있었으며, 또한 이에 대한 대책으로 일행의 복색과 언어일본과 달라 일본에 알릴 수가 없었다는 대책을 세우고 있었다.

 

 

 

실제로, 조선부터 지급되어 오던 공목의 질이 저하되어 1651년에는 공목의 반을 쌀로 바꾼 “환미제”를 요청하였고, 또 조선에서 흉년이 계속되어 6만곡의 체납이 생기자 공목의 증가를 요구하는 등, 무역확대를 꽤하는 쓰시마번의 요청은 끝이 없었다.

 

더구나 이번의 문의를 행하기 직전에는 목면을 확보하기 위해 “환미제”를 이전의 방식으로 돌리려 하고 있었다.

경우에 따라선 쌀을 요청하기도 하고, 목면을 요청하기도 하는 쓰시마번의 태도에 조선은 하멜 일행의 탈출에 대한 문의에 다른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권현당 향화의 물자도 마찬가지로 『왜인구청등록(倭人求請謄錄)』과 『변례집요(邊例集要)』에 의하면, 1640년 이래 누차에 걸쳐 보이고 있으며, 문의 직전인 5월경에도 권현당 향화의 물자를 요청하고 있었다.
쇼군 이에야스의 사당인 권현당 영건을 목적으로 한 물자의 요청은 영건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사이에 쓰시마번의 무역확대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되어 버린 것이다.

 

 

 

그것은 1627년, 조선에 표착해 온 네덜란드인 박연을 조선 측이 왜관에 보내려고 하였으나, 일본 측은 자국의 표류민이 아니라고 그 인수를 거부한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항은 동래부사의 보고에 의해 조정에서도 알게 되었고, 『접대왜인사례』현종8년 정월 10일조의 기록에 의하면, 일본 측이 이전에 박연의 인수를 거부했다는 점을 중시해, 만약에 네덜란드인을 왜관에 보낸다 하더라도 일본 측은 인수를 거부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멜의 조선표착과 탈출사건에 대한 문의를 목적으로 한 이번의 사절 파견에 대해서 불온한 의도가 있다는 판단 하에 접대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한 내용은 『현종개수실록』현종8년 2월 신미조에 상세히 언급되어 있다.

 

수찬 김석주를 접위관으로 차출해 보냈다. 일찍이 갑오년에 남만인의 배가 표류해 대정의 해변에 도착하였는데, 그들의 탄 배가 전부 파손되어 돌아갈 수 없었다.
제주목사가 치계하여 여쭙자 그들을 그냥 그곳에 머물게 있게 하였다.
병오년 가을에 그 중 8명이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갔다가 표류해 일본 오도(五島)에 도착하였다. 오도에서 이들을 붙잡아 장기로 보내니 장기태수가 그들의 거주지를 물어 보았는데, 아란타(네덜란드)의 사람들이었다. 아란타는 곧 일본의 속군(屬郡)이었다.
그 사람들을 강호로 들여보냈는데 관백이 대마 도주로 하여금 우리나라에 묻기를, “해변에 왕래하는 야소종문의 잔당들을 일일이 기찰하여 통보해 주기로 일찍이 귀국과 약조를 했었다.
그런데 아란타 사람들이 표류해 귀국에 도착했을 때, 통보하지 않았다. 표류해 온 8명은 비록 아란타 사람들이지만, 그 나머지 귀국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필시 야소의 잔당일 것이다.” 하면서 여러 모로 공갈하였다.
대개 야소는 서양에 있는 별도의 종자인데, 요술을 부려 어리석은 사람을 미혹할 수 있었다. 그들이 일찍이 일본과 상통하였는데, 뒤에 틈이 생겨 관백이 매우 미워하였으므로 매번 우리나라에 붙잡아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번에 아란타 사람들이 표류해 일본에 도착하였을 때, 관백이 우리나라에 머물러 있는 자들이 야소가 아닌 줄 알고도 이를 트집 잡아 권현당에 쓸 향화를 요구할 구실로 삼은 것이다.
그리하여 차왜가 나와 왜관에 40일을 머물러 있었으나, 조정에서 일부러 응하지 않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석주를 접위관으로 차출하여 보낸 것이다.

 

이 기록의 전반부는 하멜 일행의 조선표착과 일본에의 탈출사건, 그리고 일본의 조선에 대한 그리스도교 금제 요청을 나타내고 있다.

 

 

 

『접왜사목록초』현종8년 2·3월조에 의하면, 접위관의 파견 결정이 내려진 후에도 조일 간에는 타지마 사콘에몬이 이끌고 온 반종(伴從, 사절과 함께 따라오는 사람)의 숫자 문제가 2월 무렵에 제기 되었으나, 3월에 조선은 정관 타지마(藤成供)의 반종(伴從)을 13명으로, 도선주 이와이(藤成正)의 반종은 2명으로 응접이 결정되었다.


현재 이 응접의 정확한 날짜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접왜사목록초』에 의하면 3월 달에 정관 타시마 등과 여러 차례의 응접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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