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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란관도회권 - 데지마 상관도

 

하멜의 탈출사건과 그들에 대한 심문 결과가 막부에 보고되어 노중(老中)으로부터 조선에 이 탈출사건을 문의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그것은 쓰시마로부터 왜관에 보내진 내용, 즉 「아란타인조선강표착지일건(阿蘭陀人朝鮮江漂着之一件)」의 기사 내용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나가사키 봉행소(奉行所)로부터 에도의 노중(老中)에게 위의 내용이 보고된 바, 노중으로부터 번주(쓰시마의 번주)에게 봉서가 보내지고, 상기의 아란타인(네덜란드)인 8명이 전라도에 남아있다는 것은 듣고 있어 만약에 키리시탄(그리스도교인)이 혼재해 있다면 넘어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사항은 번주로부터 조선국에 전해질 것이고, 그 상황에 대해 상세히 조회하여 보고하도록 하라는 봉서가 도착했다.
이에 따라 요시카와 지로베(吉川次郞兵衛)에게 명령하여 조선의 참판에게 보낼 서한을 준비하여 머지않아 도해할 것이다.
그러하므로 그 건에 대해 각자에게 지시를 내린바, 김동지(金同知)가 이번 달 5일에 동래에 도착했다는 것을 듣고 있다. 그러하다면, 이 건도 김동지가 입관했을 때 편리를 도모해 처리해야 하지 않은가 라고 생각한다.

 

이 기록의 전반부분에는 표착경위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으로부터 나가사키에서의 8명에 대한 심문이 끝난 뒤, 이 사건은 에도 노중(老中)에 보고되고, 노중으로부터는 쓰시마번주 소우 요시자네(宗義眞)에게 봉서(封書)로서 지시가 내려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내용은 아직 조선에는 8명의 네덜란드인이 잔류하고 있으며, 야소종문, 즉 키리시탄(キリシタン)이 혼재해 있을 것이므로 그에 대한 조회를 명한다는 것이며, 때문에 쓰시마번은 요시카와 지로베를 파견할 사자로 정하고 조선의 예조참판에게의 서계를 준비해 도해시킨다는 것이다.

 

그 후, 「아란타인조선강표착지일건」에 의하면, 조선에 보낼 서계는 즉시 장로에게 초고작성에 대한 지시가 내려져 같은 날 초고를 지참하고 쓰시마 번주와 대면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막부의 지시를 받은 쓰시마번의 극히 신속한 대응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조선에 하멜 일행의 탈출사건을 문의한 이유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조선의 잔류 네덜란드인들 속에 키리시탄(그리스도교인)이 혼재해 있다고 막부측은 염려하고 있었다.

 

일본 측은 이러한 의심을 갖게 되었는가.
그것은 이미 1644년도에 조선에 표착한 광동선에 키리시탄이 혼재해 있어, 조선에서 일본에 광동선을 인도했을 때, 그 사실이 발각되었던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1644년부터는 의심스러운 이국선이 조선에 월경했을 경우, 왜관에 그 사실을 통보해 달라고 수차에 걸쳐 그리스도교 금제에 대한 협조요청했었고, 조선도 거기에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여 “공조(共助)”를 표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측으로서 이러한 문의를 행하는 그 자체가 명분 있는 행위였다.


다시 말하면, 하멜 등 8명의 탈출사건에 대한 일본 측의 조선에 대한 문의의 목적은 그리스도교 금제 정책에 있었던 것이다.

 

 

 

일본 측으로부터 하멜 등의 탈출사건에 대한 막부로부터의 문의가 있을 것이라는 정보는 당시 도해역관사였던 김근행과 차왜와의 문답으로부터 조선 측에 전해지게 되었다.
그 상황은 『접대왜인사례(接待倭人事例)』현종7년 10월24일조의 기록으로 확인된다.

 

동래서장, 비변사계목 중에 의하면 차왜 등과 김근행이 문답을 행했는데, “소위, 13년전 아란타(네덜란드)인 36명이 물화를 싣고 제주에 표도하였는데, 제주의 인민들은 그 재화를 전부 빼앗았다.
그들을 전라도에 분치하였는데, 생존자 16명 중에서 8명이 올해 늦여름 무렵에 작은 배에 숨어 타고 고토(五島)에 도망쳐 왔다.
때문에 에도(막부)는 그 시말을 알고자 한다. 예조에 서계를 준비하여 머지않아 차왜가 올 것이다.”라고 합니다. 소위 아란타인은 지난 날 제주도에 표도한 만인을 가리키는데, 그 복색이 왜와 같지 않았고, 언어도 통하지 않았는데, 어디에 근거를 두고 일본에 입송하겠습니까. 난파선의 재물은 표류해온 자들에게 각자 처분토록 했으므로 우리에게 잘못은 없고 숨길 것도 없습니다.

 

이 내용은 역관 김근행이 차왜로부터 들은 정보를 근거로 하고 있는데, 13년 전에 제주도에 표착해 전라도에 분치되어 있던 하멜 일행 중에 8명이 탈출한 탈출사건을 알림과 동시에 이에 대한 문의를 위해 차왜파견될 예정이라는 것이다.


단지 기록의 날자가 10월24일(양력으로는 1666년 11월20일)로 되어 있는데, 이 기록은 일본인 접대에 관한 중앙의 등록과 같은 것으로 조정에까지의 보고기간을 염두에 둔다면, 음력 10월24일에서 부산 동래에서 서울까지 보고가 전달되는 시간을 염두에 둔 이전이다.

 

 

 

그러면 정보누설 차왜는 누구인가.
그것은 『현종실록』현종7년 10월 경오조의 기록으로부터 귤성진(橘成陳)이라는 것이 판명되며, 그는 일본 이름으로 이데 야록쿠자에몬(井手彌六左衛門)이다. 그의 정보 누설이 고의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단정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일본 측의 문의에 대해 조선 측의 역관이 왜관에 입관했을 때 전달해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할 의도가 있었던 것이며, 이는 조선정부에 문의 사항을 전달하는데, 미리 알려주어 편의를 모색한 행동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사실은 즉시 동래부사 안진의 치계에 의해 1666년 10월23일(음력) 조정에서도 알게 되었다.
『현종실록(顯宗實錄)』현종7년 10월 경오조의 기록을 살펴보자.

 

동래부사 안진이 치계하여 말하기를, “차왜 귤성진 등이 은밀히 역관들에게 말하기를, ‘10여년 전에 아란타군민(네덜란드인) 36명이 40여만냥의 물건을 실고 표류하여 탐라에 닿았는데, 탐라인들이 그 물건을 전부 빼앗고 그 사람들을 전라도 내에 흩어 놓았다.
그 가운데 8명이 금년 여름에 배를 타고 몰래 도망 와서 에도에 정박했다.
그래서 에도에서 그 사건의 전말을 자세히 알고자 하여 서계를 예조에 보내려고 한다.
아란타(네덜란드)는 바로 일본의 속군(屬郡)으로 공물을 가지고 오던 길이었다. 황당선(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선박)이 표류해 오면 즉시 통지해 주기로 굳게 약속하였는데, 지금 통지해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 물건을 빼앗고 사람을 억류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성실하고 미더운 도리인가.
차왜가 나오면 반드시 서울에 올라가 서계를 올린 것인데, 본부와 접위관의 문답이 예조에 답한 서계와 다르지 않아야 일이 어긋나는 단서가 없게 될 것이다. 또 도주와 강호의 집정자 사이에 틈이 있는데, 이번일은 매우 중대하여 만약 서로 어긋나기라도 한다면 도주가 먼저 화를 입을 것이다.’하였다.” 하니, 상이 비국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
회계하기를, “장계에 말한 아란타 사람은 몇 년 전에 표류해 온 만인을 말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복색이 왜인과 같지 않고 말도 통하지 않았으므로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는데, 무슨 근거로 일본에 들여보내겠습니다.
당초에 파손된 배와 물건을 표류해 온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였으므로 우리에게는 잘못이 없으니 숨길만한 일도 없습니다.
차왜가 오면 그대로 답하면 그만입니다. 역관을 시켜 복장과 말이 왜인과 같았는지를 한번 물어보고 그들의 답을 들은 다음에 만인의 실상을 갖추어 언급해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공문을 보내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하니 상이 따랐다.

 

차왜 귤성진(이데 야록쿠자에몬)은 은밀하게 역관(김근행) 등에게 하멜 일행의 탈출을 알리는 동시에 에도(江戶), 즉 막부는 이 사건의 전말을 상세히 알기 위해 예조에 서계를 보내려고 한다는 내용을 전한 것이다.

 

 

 

이에 대해 동래부사 안진은 동래부와 접위관의 문답이 예조의 답서와 같게 하여 일이 어긋남을 방지해야 한다고 진언하고 있으며, 비변사는 일본 측의 문의에 관한 차왜의 파견에 대비하여 네덜란드인들이 표착했을 때, 복장이 일본인들과 틀렸으며, 언어도 물론 통하지 않았고,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몰랐으므로 인도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대응책을 세운 것이다.
이것은 처음에 동래부사가 보낸 장계의 내용(『접대왜인사례』현종7년 10월24일조)에 보이는, 일본의 문의에 대한 대책을 그대로 수용한 결과이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하멜 일행과의 의사소통은 가능했었으며, 그들이 네덜란드인이라는 것도 인식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1627년에 조선에 표착한 네덜란드인 박연이 그들의 통역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이 제주에 표착했던 1653년 당시, 제주에 내려간 박연이 하멜 일행을 심문한 내용(『지영록』의 「서양국표인기」)과 제주목사 이원진의 조선에 보고한 내용(『효종실록』효종4년 8월 무진조)으로 확인할 수 있다.

즉, 조선정부는 일종의 변명에 지나지 않은 임기응변식의 대응책을 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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