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하멜정보관>탈출과 일본>일본의 표착처리>나가사키 상관일지의 기록

 

이 기록이 당시의 상관장이었던 훨허르에 의해서 작성되고 있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지만, 상관장이 10월1일 나가사키를 출항하고 있어 하멜 일행에 관한 사건 전반적인 내용들이 VOC에 연락되고 있음도 파악할 수 있다.

 

3일전부터 고토(五島)의 영주가 나가사키 부교 마쓰다이라 진자부로(송평심삼랑(松平甚三郞)에게 편지를 보내 유럽인으로 보이는 복장을 한 8명이 외국풍의 선박으로 여러 섬들 중의 한 섬에 도착했기

때문에 기후와 풍향을 기다려 곧 나가사키로 보내겠다는 보고했다는 소문이 흘러 다니고 있었다.


이 소문은 시시각각으로 내용이 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내용 중의 어느 것을 기록해 둘까 잘 몰랐었는데, 오늘 아침 일찍 앞에서 말한 외국선과 외국인이 어젯밤 고토(五島)로부터 이곳에 도착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리고 부교에 의해서 모든 것들에 대한 심문을 받은 뒤, 오후 1시에 데지마(出島)의 우리들이 있는 곳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그들이 1653년 야하트선 스페르붸르호로 5일간 계속된 놀랄만한 풍랑에 의해 8월16일에 켈파르트(제주도) 섬에서 난파하여 살아난 네덜란드인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들 8명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 호르쿰 출신(Gorcum)의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 : 1651년에 훠헬 스트라위스(Vogel Struijs)호에서 포수로서 인디아(정확하게는 바타비아를 말함)에 항해하고 후에 서기로 승격하였다. 월급 30길더.
  • 로테르담(Rotterdam) 출신의 호훠르트 더네이스(Govert Denijs) : 1651년에 노르트 로테르담(Noord Rotterdam)호로 그곳(바타비아)에 선원으로서 내항.
  • 앞의 호훠르트 더네이스의 아들 호훠르트 : 동일한 선박으로 바타비아에 도착. 월급 5길더.
  • 엔크하이젠(Enckhuijsen) 출신의 마테이스 보켄(Matthijs Bocken) : 1652년에 노르트 엔크하이젠호(Noord Enckhuijsen) 호로 인디아(바타비아)에 외과의사로서 내항. 월급 14길더.
  • 헤레벤(Heerenveen) 출신의 얀 피테르스 : 월급 11길더의 포수로서 1651년에 훠헬 스트라위스(Vogel Struijs)호로 인디아(바타비아)에 도착.
  • 로테르담 출신의 헤리트 얀스(Gerrit Jans) : 1648년 젤란디아(Zeelandia)호로 인디아(바타비아)에 도착. 급사였으나, 후에 10길더의 선원으로 승격.
  • 암스테르담 출신의 베네딕투스 클레륵(Benedicyus Clerk) : 1651년 젤란디아호로 인디아(바타비아)에 도착. 월급 5길더의 급사.

나는 앞에서 언급한 사람들이 코레아(조선) 섬의 주민들 사이에서 13년간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는지 여기서 길게 언급할 생각은 없으며 그렇게 할 수도 없다. 그것은 그 자체가 상당히 자세한 기술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다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들 불쌍한 사람들 외에 28명을 추가한 36명은 앞에서 언급한 야하트선 스페르붸르호로부터 구조되어 켈파르트 섬에 상륙하였고, 최초의 8개월은 이 지역에 억류되어 나중에 코레아의 여러 섬에 연행되어 자주 이곳저곳으로 이동되어 졌고, 그 사이에 계속 차갑고 불쌍한 대접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동료 22명은 차례로 사망하여 그들 16명만이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들 중의 8명이 코레아로부터 탈출할 때도 아직 건재해 있었고, 나라의 여러 곳에 분산되어져 있으며, 단지 3명만이 그들이 그곳에서 탈출할 것을 눈치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원래의 집에 남겨두고 온 것이다. 그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 암스테르담 출신의 요하네스 라펜(Johannis Lampen), 조수.
  • 도르트 출신의 얀 클라이젠(Jan Claeszen), 요리사.
  • 후레켈른 출신의 야콥 얀스(Jacob Janse).
  • 리츠 출신의 산더 바스켓(Sander Basket).
  • 코트레히트 출신의 양 얀스 펠트(Jan Janse Pelt)
  • 프리덴 출신의 안토닉 우더릭(Anthonij Ulderic)
  • 오스트폴트 출신의 클라스 아렌첸(Claes Arentszen)

부교 진자부로(甚三郞)는 처음에 말한 8명을 데지마에 있는 우리들에게 보내어 왔고, 또 통역관을 통하여 “그들을 정중하게 대우하고, 그들이 코레아의 군도에서 다행스럽게 탈출해 그렇게 작은 배로 그들의 자유를 되돌려 놓았는데, 이렇게 먼 곳을 생명을 걸고 돌파할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당신은 그들과 함께 출발하고 싶겠지만, 자신은 이것에 관해, 에도(江戶)에 편지를 써, 그 답변이 오고 나서 (그들의) 출발을 허가할 예정이다.”라고 전해왔다. 우리들은 각하의 훌륭한 마음 씀씀이에 매우 감사해하고, 각하의 명령대로 따르겠다고 전해주었다.

 

앞에서 언급한 사람들은 이번 달 4일 저녁에 작은 배로 코레아를 탈출하여 불어 닥친 북풍을 타고 고토(五島) 제도에 도착하였으며, 그곳에서 10일에 강한 남풍 때문에 (그들과의 생각과는 달랐지만) 친구들이 있는 곳에 왔는지, 아니면 적지에 왔는지도 모른 체 항구에 들여보내질 수밖에 없었다.

 

나의 생각으로 특기할만한 것은 스페르붸르호의 구조된 선원들이 켈파르트 섬에 있었던 8개월간 어느 누구도 그들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 없었는데, 그 때 쿠레아로부터 네덜란드인과 아주 닮은 한 명의 노인이 와서(명확하게 이 섬의 영주가 코레아의 국왕에게 요청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사람들을 긴 시간 관찰하고 난 후, 더듬더듬 거리는 네덜란드어로 “당신들은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라고 물어 보았고, 그리고 나서 그들이 네덜란드인이라는 것을 알자, “나도 네덜란드인으로서 드 라이프(De Rijp) 출신이며, 양 얀스 벨테브레라고 말하며, 이곳에 26년간 체제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더욱이 “자신은 1627년 야하트선 오붸르케르크(Ouwerkerck)호로 항해를 하다가 이 선박이 북쪽의 해협에서 붙잡은 정크선에 옮겨 타, 이 코레아의 제도 부근을 표류하다가 동료 수명과 육지에 물을 구하러 갔다가 두 사람의 동료와 함께 중국 사람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이 두 사람은 이 제도가 타르타르인(청국인)에게 점령되었을 때 전사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양 얀스 벨테브레는 이 8명이 코레아로부터 떠났을 때에도 아직 생존하고 있었으며, 약70세였다.

 

박연이 말하기를, “일본이 시장을 열어 놓은 곳은 오직 나가사키(長崎)뿐이다.
그러나, 교역하는 일은 이전과 달라 타국의 상선이 하륙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선상에서 서로 거래하는데, 그 나라 사람이라도 타국에 왕래하는 자는 반드시 죽인다.
하물며 너희들 타국인은 어찌하겠는가.
나와 같이 서울로 올라가 도감(훈련도감)의 포수로 입속하는 것만 못하리라. 즉, 옷과 먹을 것에 여유가 있고, 몸이 안전하여 무사할 것이다.”고 하였다.

표류한 만인 등이 이 말을 듣고 나서부터 고향 땅으로 돌아가는 것에 절망하고, 자못 함께 일하자는 감언을 믿었다.

 

 

 

그런데, 원래 이 당시 조선에 아직 남아있던 네덜란드인은 8명인데, 여기에는 7명만 기록하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일행이 나가사키에 도착해서 나가사키 부교의 심문 조사를 받았을 때는 8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하멜이 탈출한 후 조선의 기록에도 8명이 생존해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8명이 정확한 것이다.

 

또한 상관장의 기록으로부터 박연이 1627년 조선에 표착하게 된 사연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하멜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과는 약간 다른 것으로 박연과 동료 2명 3명이 물을 얻기 위해 조선에 왔다가 붙잡혔다는 사실은 동일하지만, 중국인에게 잡혔다든가, 또는 정크선을 나포해 거기에 승선해 있었다는 등의 내용에 대해서 하멜은 그의 보고서에 전혀 기록하고 있지 않은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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