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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린통서(善隣通書)』의 「아란타표인고사장왕복(阿蘭陀漂人告事狀往復)」(국사편찬위원회 소장)에 양국의 서계가 기록되어 있으며, 기록의 서두에는 하멜 일행의 조선표착부터 귀국까지의 개략이 간단하게 보이고 있다.

 

그 외에 하멜 일행의 탈출 후 일본에서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조선국에서 당인 및 남만인 송래기(朝鮮國ヨリ唐人幷南蠻人送來記)」(국사편찬위원회 소장), 『본방조선왕복서(本邦朝鮮往復書)』권22~23 (동경대학사료편찬소 소장) 등의 기록이 있다.

 

쓰시마번의 번청(藩廳)기록인 『매일기(每日記)』(나가사키 현립대마역사민속자료관 소장)에도 관련기사가 다수 보이고 있으나, 대부분 『분류기사대강(分類紀事大綱)』의 「아란타인조선강표착지일건(阿蘭陀人朝鮮江漂着之一件)」에 정리되어 있다.

 

아란타인조선강표착지일건   아란타인조선표착지일건

 

 

우선, 여기에서는 하멜이 고토(五島)의 나마촌(奈摩村)에 표착한 후, 일본 측은 하멜 일행을 어떻게 처리했는가에 대해 살펴보겠는데, 우선 일본 측의 기록인 「아란타인조선강표착지일건(阿蘭陀人朝鮮江漂着之一件)」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13년 이전에 네덜란드 고사선(高砂船)에 66명이 승선하고 상매를 위해 일본에 가던 중, 바다에서 강풍을 만나 난파하였다.
그 중의 30명은 사망하고, 나머지 36명이 조선국의 세이시우도(せいしう嶋=제주도)라는 곳에 표착한 것을 그곳의 사람들이 붙잡아 케라도(けら道=전라도)에 연행한 후, 그 지역의 담당 관리에게 넘겼다. 그 중에서 20명이 병사했다.

남은 16명이 지난 달 7일에 조선의 배를 훔쳐 도망쳐서 고토의 영내에 표착한 것을 五嶋民部(고토 모리키요=五嶋盛淸)가 어정소(御政所, 일정의 행정관청)에 보내고, 이전에 에도(=막부)에 보고한 마을의 처리 방안을 들었으므로, 어정소에 가서 가로들에게 문의한 바, 마쓰다이라 진자부로(松平甚三郞)가 이 사실을 듣고, 가로들에게 명령하여, 주의를 기울여 데려왔는데, 도리에 당연한 것이다.

 

이 내용은 나가사키에 체재중인 쓰시마번사가 쓰시마에 보낸 연락으로 보이는데, 하멜 일행의 표착 후, 고토번(五島藩)이 어떠한 처리를 행하고 있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사실 확인부터 해보면, 상기의 기록에는 66명이 조선에 표착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64명이 정확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せいしう嶋」는 제주도, 「けら道」는 전라도를 가리킨다.
그런데, 기록에는 제주도에서 전라도로 연행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사실은 서울로 이송된 뒤에 서울에서 청국 사신에게 본국 송환을 호소하는 사건을 일으켜 서울에서 전라도로 분치되고 있었다.

 

 

 

하멜이 고토에 표착하기 2년 전에 고토번에는
이국선의 표착 또는 파손이 있을 때에는 속히 후쿠에(福江) 봉행소(奉行所)에 보고할 것이며, 다른 회선(廻船)을 이용하여 2리·3리 밖으로 몰아내고, 이동치 않을 시에는 선박을 정박시킬 것. 그리고 이국선(異國船)에 번선(番船, 일종의 감시선)을 붙여, 밤에는 산언덕에 봉화를 밝혀 주의를 기해야만 할 것.
첨부, 이국인(異國人)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그들로부터 예물(禮物) 또는 음식물에 이르기까지 일절 받아서는 안 된다.”(『長崎縣史』사표편2)
라는 내용의 지시가 내려지고 있어, 하멜 일행의 표착처리는 바로 이 지시에 의해 처리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모리키요에 의해 고토번의 후쿠에 봉행소(御政所)에 보내지고 있다는 것, 또 『하멜보고서』에 의하면, 그들이 고토에 표착한 후, 나가사키에 송환되기 전까지의 3일간은 정박한 상태에 있었으며, 선상에서도 육지에서도 엄중한 감시를 받고 있었다는 것으로부터도 이 지시가 표착 이국선 처리의 기준이 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후, 하멜 일행은 고토(五島)의 나마(奈摩)에 표착한 후 일본의 일반적인 표착 이국선 처리 방침에 의해 나가사키(長崎) 부교에게 연락하였고, 곧이어 9월13일 해가 뜨자마자 대형 선박 2척과 소형 선박 2척의 호위를 받으며, 저녁 무렵 나가사키(長崎)에 도착하였다.

 

당시 일본은 이국선 대책의 일환으로서 일본 국내에 표착한 거의 모든 선박은 나가사키로 이송케 하였으며, 거기서 나가사키 부교(奉行)의 조사를 받게 하고 있었다.

 

 

 

장기출도도-1825년 데지마의 모습그는 일행에게 사건의 자초지종을 심문했고, 그것을 기록했다.
여기서 작성된 조서가 나가사키 부교에게 전해졌고, 정오 무렵에는 부교에 의한 심문 조사가 실시되었다.
부교는 일행에게 자유를 찾아 그토록 낡고 허술한 배로 망망대해를 건너 큰 모험을 감행해 자유를 쟁취한 것에 높이 치하했다고 하멜은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는 하멜 일행을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동인도연합회사의 상관, 즉 인공섬으로 만들어 놓은 데지마(出島)로 보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9월14일에 일본의 네덜란드 상관으로서 네덜란드인이 거주하고 있던 데지마(出島)로 처음 들어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대한 일본 정부의 조사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가사키 부교가 하멜 일행에게 1년을 더 남아 있어야 한다고 명령을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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