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하멜정보관>전라병영 생활>분산생활과 탈출

 

조선(여수)에서 일본으로 탈출하멜 일행은 전라병사에게 그동안의 호의와 친절에 인사를 하고, 각기 배정된 여수좌수영, 순천, 남원 지역으로 출발하였으며, 순천과 여수좌수영으로 떠나는 인원은 같은 방향으로 길로 출발했다.

 

첫날 저녁에는 한 고을에 도착하여 머물렀고, 넷째 날이 돼서야 순천에 도착하였다.
거기에서 순천에 머물기로 한 5명을 제외한 인원은 그 다음 날 다시 출발하였는데, 지금까지 이동하면서 밤마다 창고에서 지내야 했다고 하멜은 기술하고 있다.

 

그 다음 날 이른 아침에 출발하여 오전 9시경에는 여수좌수영에 도착했다.
일행은 즉시 전라좌수사에게 인계되었으며, 그들에게는 가구가 갖추어져 있는 집 한 채가 주어졌고, 또 이전에 지급되어졌던 수당이 지급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하멜보고서』의 기록에 남원과 순천의 상황에 대해서는 거의 설명되고 있지 않은데, 여수에 도착한 상황은 비록 간단하기는 하지만,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하멜이 순천을 거쳐 여수에 도착하였기 때문에 『하멜보고서』에 여수의 상황까지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어쨌든 하멜을 포함한 12명의 인원의 여수생활이 시작되었는데, 그들이 도착할 당시 선량하고 온화한 전라좌수사는 일행이 도착한 이틀 뒤에 다른 곳으로 떠났다.
그가 떠난 지 사흘 만에 새로운 좌수사가 도착했으나, 불운하게도 그는 친절하지도 선량하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하멜 일행을 뜨거운 태양 빛 아래에, 또는 비와 우박이 쏟아지는 겨울에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대기시켜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여수에서는 겨울이 다가오는데도 흉년으로 인해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입은 옷뿐이었다. 하지만, 다른 두 곳의 순천과 남원에 있는 사람들은 그곳의 수확량이 많았기 때문에 옷가지를 장만할 수 있었다.

여수에 있던 하멜 일행은 이러한 사실을 말하여 일행 중의 반은 3일간의 외출허가를 얻었다. 하지만, 15일에서 30일간의 외출도 가능했었다고 하멜은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1664년까지 계속되었으며, 당시의 전라좌수사는 임기가 만료되어 전라도 관찰사 밑의 직위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하멜 일행은 새로운 좌수사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 이전의 좌수사와는 달리 일행을 모든 부역에서 해방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순천과 남원에 있던 일행이 하고 있는 일만큼만 하라고 지시하였다.
또한 새로 부임한 좌수사는 한 달에 두 번의 검열을 받는 것 이외에는 외출도 허락하고 있었는데, 이때의 좌수사에 대해서 하멜은 “좋은 사람을 부임시켜 주신데 대하여 우리들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감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전보다는 그들에 대한 감시도 느슨해졌기 때문에 그들은 를 구입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때도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어려움은 있었으나, 간신히 작은 나룻배 한 척 구할 수 있어 비상식량을 비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이 배를 이용해 여수 주변의 섬들을 오가면서 주변을 살펴두었다.
여수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웠던 생활이 그들에게는 탈출할 생각을 갖게 했던 것이다.
물론 탈출에 대한 그들의 열정은 당초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나, 배를 구입하기 위한 경제력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수의 전라좌수사는 지방관으로서의 임기가 만료되어 더 높은 직위로 영전하여 갔기 때문에 새로 좌수사가 부임해 왔다. 그는 이전의 악덕한 관리와 마찬가지로 하멜 일행에게 온갖 잡일과 노역을 시켰다.
일행은 이에 대해 어느 정도의 부당함을 호소했으나, 좌수사는 늘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멜 일행에게 다행스러운 일이 발생했다.
여수에서의 수군 훈련 중에 포수의 부주의로 탄약상자에 불이 붙어 5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다.
좌수사는 이 돌발 사고를 은닉하여 감쪽같이 숨겨두고 싶어 했으나, 항상 왕의 측근자로서 동시에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암암리에 지방사정을 탐지하고 돌아다니는 자, 즉 암행어사에게 발각되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된 기사는 『현종실록』현종7년 4월 정묘조에도 기록되어 있어 얼마나 하멜이 정확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는가도 느낄 수 있다.

 

전라 좌수사 이민발이 앞바다에서 수군을 조련하다 전선에 불이 나서 세 사람이 죽었는데, 이민발이 숨기고 보고하지 않았다. 감사 민유중이 이 소식을 듣고 치계하여 그를 치죄할 것을 청하니, 상이, 죽은 자를 돌보아 주고 이민발을 잡아다 죄를 정하라고 명하였다.

 

결국, 『하멜보고서』에 의하면 좌수사 이민발은 90대의 태형과 함께 종신 유배되고 있었다.

 

 

 

지금까지 하멜 일행이 전라도 강진에서 유배되어 다시 여수, 순천, 남원 등의 3곳으로 분산되었다는 것은 일반적인 사실이었으나, 최근에 이를 부정하여 『하멜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는 3곳의 명칭에 대한 발음 중에 사에시잉(Saijsingh)은 좌수영이 아니라, 신성(新城)이라는 주장〔헨리 사브나이예(Henny Savenije)〕이 나오고 있다.


당시 신성이라는 곳은 순천에서 동남쪽으로 약 12Km 떨어진 곳에 신성포(新城浦)라는 곳이 있어 확인은 되고 있으나, 이곳은 순천의 행정관할 구역이었다.

하지만 하멜 일행은, 하멜이 말한 사에시잉(Saijsingh)이라는 곳에서 좌수사의 관할 하에 있었다.

 

즉, 하멜이 그의 보고서에 좌수사에 관한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여수에 있었다는 것이며, 일행을 관리하고 있던 것도 좌수사였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하멜 일행은 『현종실록』현종7년 4월 정묘조에 기록된 여수 좌수사의 폭발사고로 인한 기록조차 아주 상세히 남기고 있다. 이러한 근거로 볼 때, 사에시잉(Saijsingh)이라는 곳은 신성(新城)이 아니라, 바로 여수 좌수영을 의미하는 것이다.

 

 

 

새로운 좌수사가 부임하여 왔으나, 마찬가지의 부역과 잡일로 그들은 고통을 면치 못하였다.
다행히도 그들은 그전보다 더 많은 자금을 모으게 되었다. 그것도 그들의 당시 자금으로 돛단배를 정가의 두 세배로 값을 치를 수 있는 액수였다.
따라서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늘 배를 입수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 때마다 실패를 거듭했는데, 그것은 하멜 일행이 탈출에 대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멜은 이때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매일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우리를 질시하는 자들의 억압 밑에서, 이역만리 하늘 아래서 시름과 설움에 젖어 노예 신세로 계속 살아가느니보다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모험을 감행하기로 결심하였다.

 

 

다행히도 이때에 그들의 탈출을 도와줄 새로운 조력자로서 조선인 한 사람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는 매일 같이 하멜 일행의 집에 들러 곧잘 식사도 같이하고 술도 얻어먹고 가는 이웃이자 친한 조선인이었다.

물론 이 조선인이 하멜 일행의 탈출 의도를 알았다면 도와주지 않았겠지만, 톡톡히 사례하겠다는 약속에 배를 구입해 준 것이다.

 

마침내 부근의 어부에게 한 척을 구입할 수 있어 그 조선인 친구에게 대금을 치르고 배를 인도 받았다.
하지만, 그 배를 판 사람이 하멜 일행이 배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고 제3자를 통해 불법으로 거래한 것이니 물리겠다고 억지를 부리게 된다. 만약에 하멜 일행이 배를 타고 도망갈 생각으로 구입한 것이라면, 자기는 죽은 목숨과 같다며 고집을 부리기도 하였다.
일행은 그의 말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있기는 하였지만, 탈출을 위해 안심하라고 달래면서 원래 배 값을 더 얻어주고 구입하여 결국 2배의 배 값을 치루고 배를 구입하였다.

 

 

 

탈출에 가장 적합한 시기도 새로운 절기, 즉 음력 9월8일 백로(白露)가 시작되는 다음 달로 잡아두기도 하였다.

 

한편, 때마침 찾아 온 순천의 마테우스 에이복켄(Matheus Ibocken)코넬리스 디룩스죤(Cornelis Dircksz)이 여수를 방문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탈출계획을 설명함과 동시에 순천에 있는 항해술에 뛰어난 양 피테르세(Jan Pieterse)까지도 불러들이기로 하였다. 그들 부르기 위해 순천까지 갔으나, 그가 남원에 나들이를 가고 없어 다시 남원까지 가서 양 피테르세를 데려왔다.


이들이 걸었던 거리는 사흘 동안 네덜란드 마일로 무려 왕복 50메일(메일=네덜란드 마일, 1메일은 5,555.6=약 5.6Km), 다시 말하자면 현재의 거리로 약 280Km를 걸었던 것이다.
이 정도의 고통을 감수할 정도로 하멜 일행에게는 탈출을 위한 항해사가 필요했던 것이고,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잘 말해 주고 있다.

 

 

 

탈출을 위한 만반의 준비가 끝나고, 드디어 9월4일 저녁 흥겹게 노는 척을 하며 틈틈이 쌀, 물, 냄비 그리고 그 밖의 항해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된 탈출용 배에 옮겨 놓았다.

 

달이 지기를 기다렸다가 썰물이 들어오기 전에 탈출을 감행했다. 곧이어 부근의 섬에서 물을 구한 후 돛을 올려 만을 빠져 나왔다.

 

 

 나의위치:하멜정보관>강진병영 생활>분산생활과 탈출 인쇄하기


카피라이트로고

이용안내 개인정보보호정책 홈페이지개선접수
뷰어프로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