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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성에서의 제초작업

 

그들이 도착했을 당시의 전라 병사는 직무상의 과실로 인하여 파직을 당할 위기에 처해있었으나, 많은 백성들로부터 흠모를 받았고, 명문가 출신에다 조정 대신들의 변호가 있어 왕의 특별 사면을 받았다고 『하멜보고서』는 기록하고 있다.
이때의 병사는 유정익(柳廷益)으로 하멜은 이때의 전라병사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런데 전임자와는 완전히 하멜 일행에게 강압적인 대우를 취했다.
그 전에는 땔감도 무료였으나, 그와 같은 특혜들을 전부 무효로 하였고, 오히려 여러 가지의 잡일로 일행을 괴롭혔다.
그러나 9월에 그가 심장마비로 급사하는 바람에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더군다나 병영의 백성들조차도 그의 악정으로 규탄하며 그가 죽은 것을 다행으로 여길 정도였다고 하멜은 기록하고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병사는 하멜 일행에 대해 전혀 무감각한 존재였다.

옷이라든가 여타의 사정을 부탁해도 효종이 그들에게 지급을 약속한 50근의 쌀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지시받은 것이 없다며 거절했고,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일행 스스로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으나, 그들에게 의복이라고는 나무를 하러 다니다가 다 해진 옷들뿐이었다.

 

한편, 강진 병영의 생활은 어떤 면에서는 하멜 일행에게 자유로움 그 자체였다.
제주에서나, 서울에서의 생활은 감시와 통제 속에서의 생활이었으나, 이곳에서는 그들이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지 병사의 허락만 있으면 가능했다.

 

『하멜보고서』에는 그들이 생활에 어려움을 겪자 조선에서는 동냥이 흉이 아니라는 것으로 판단하고, 그들의 모험담을 들려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 일을 하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구걸 등을 통해 얻은 수입으로 월동 준비에 필요한 이런 저런 물건을 구입했던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일행이 모험담을 대가로 수입을 올렸다는 것인데, 1653년에 표착한 그들은 약 4년이 지난 1657년에 이미 조선어에 능통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조선 사람에게 조선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으며, 더군다나 모험담을 파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수입이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이미 조선 속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임 병사는 또 다시 일행에게 외출을 금지했고, 1년에 4발 정도의 피륙을 주는 조건을 내걸어 사역에 동원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그 대가가 너무나 적었고, 가뭄에 물가가 폭등하여 그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였다.

대신에 하멜 일행은 일행이 교대로 15일 내지는 20일간의 여행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을 하여는데, 이내 승낙이 떨어졌다. 그 승낙은 일행들 사이에 열병이 퍼져있어 집에 남은 자들이 병자들을 간호하겠다는 것과 절대로 서울과 일본인들이 거류하는 근처에는 가지 말 것 등의 조건이 있었다.

 

 

 

『하멜보고서』에는 세자 현종이 그 왕위를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하멜은 기록하고 있으며, 16660년부터 1662년까지의 강진 생활에 대해서는 별다른 문제없이 아주 자유로운 생활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강진 부근의 절에 대한 하멜의 평가는 대단히 우호적이다.
그들은 스님들에게 많은 덕을 받았으며, 또 스님들은 외국에 대한 풍물에 깊은 관심을 보여 다른 나라의 풍습을 들려줄 때면 더욱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만약에 하멜 일행만 괜찮다고 한다면, 꼬박 밤을 새워 들어도 직성이 풀리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멜은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그 또한 일행에 매우 동정정인 입장의 사람으로서 자신에게 권한이 있다면 하멜 일행을 고국으로 돌려보내주겠노라고 누차에 걸쳐 언급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 해부터 예기치 않은 불행이 하멜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즉, 매우 혹독한 가뭄이 조선 전역에 퍼진 것이다.
『하멜보고서』에 의하면 1662년은 추수철이 되기 전까지 천여 명이 기근으로 죽어갔고, 노상강도가 횡행하여 길을 나서기조차 두려웠다고 한다.
이때에는 경비가 철통 같이 실시되었는데, 이것은 강도와 살인 행각을 방지하고 길거리에 널려있는 죽은 자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서였다. 때로는 국가의 창고를 습격해 비축해 둔 군량미를 탈취하는 등 여러 고을들이 피해를 입고 있었다.

 

이러한 기근은 1662년 초반까지 약 3년이 계속되었는데, 백성들은 수확이 없었기 때문에 모종조차도 못할 지경이었다.
때문에 당시의 전라병사는 하멜 일행에게 지급되어 오던 양곡을 더 이상 배급해 줄 수 없다는 뜻을 전라도 관찰사에게 보고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비변사등록』현종 3년 정월 20일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아뢰기를, “연전에 제주도에 표류해 온 만인(蠻人)을 서울에 머물러 두는 것이 불편하므로 모두 전남 병영으로 옮겨 보내어 관가에서 식량을 주도록 했는데 이미 사고로 죽은 이를 제외하고 현재 남은 인수가 23명이나 됩니다.
지금 전남감사 이태연(李泰淵)의 보고를 접하니, ‘병영은 바로 강진 지방이므로 강진에 회부한 곡식으로 만인(蠻人)의 식료(食料)를 지급해야 하는데 본 고을은 기황(飢荒)이 더욱 심한 지역이라 받아들일 환곡이 겨우 66석 남짓합니다.
앞으로 구제할 자본이 여전히 부족할까 염려되므로 만인(蠻人)의 식량을 이을 수 없습니다. 이들을 다른 고을의 조금 나은 곳으로 옮겨야합니다.’고 하였습니다.
사세가 실로 보고한 바와 같다면 본도 감사로 하여금 그 다소를 참작하여 좌수영과 좌도 큰 고을에 옮겨두고 착실히 단속하여 마을에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폐단이 없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오니 이러한 뜻으로 분부함이 어떠하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답하였다.

 

즉, 전라 병사 이태연은 병영은 강진이고, 강진에 부친 쌀을 남만인(=하멜 일행)에게 지급해야 하는데, 기근이 심해 만인에게 지급할 것이 없다는 것을 보고한 것이다.
때문에 비변사에서는 정세가 보고한 대로라면, 전라감사에게 명하여 좌수영 및 전라도 내의 큰 고을에 이주시킬 것을 진언해 현종의 윤허를 받아내고 있다.
한편, 이 기록은 정월 20일조이므로 양력으로는 1662년 3월9일에 하멜 일행에 대한 전라도 내 분산 거주가 결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분산 거주 결정에 대해서 하멜은 그의 보고서에 “2월말에 상부로부터 그에 대한 답장을 받았다. 그 당시 살아있던 22명의 우리 일행을 여수좌수영(Saijsingh)에 12명, 순천(Suintchien)에 5명, 남원(Namman)에 5명으로 각각 분산 수용하라는 지시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약간의 의문이 남는다.
즉, 『비변사등록』현종 3년 정월 20일조의 기사에는 잔류 인원이 23명이었는데, 『하멜보고서』에는 22명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라감사가 비변사에 하멜 일행에 대한 조치를 문의한 직후 일행 중 한 명이 사망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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