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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보고서』에 의하면, 일부 고위 관리는 일행 각자에게 무기를 주어 죽을 때까지 싸우게 대결시켜 백성들로부터 외국인을 노골적으로 살해한 왕이라는 원성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제안도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이러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동안 그들은 감금 상태에 있었고, 다만 박연만이 그들에게 “당신들의 목숨이 사흘간 더 붙어 있다면 장차 명대로 오래 살 것이다.”라는 말을 하였을 뿐이다.

 

 

 

한강 변에서 박연과 작별을 하였는데, 그것이 박연과 하멜 일행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하멜 일행은 제주에 표착하여 서울로 이송되었을 때, 이용한 길을 다시 한 번 거슬러 내려가 영암을 거쳐 목적지인 전라 병영에 도착했다. 1653년 표착할 당시는 36인이었지만, 서울로 이송되던 중 영암에서 한 명이 사망하고, 또 탈출 사건으로 두 명이 사망했기 때문에 이때가지 생존해 있던 일행은 33명이었다.

 

『하멜보고서』에 의하면, 이곳에는 전라도의 군사령관인 병사(兵使)의 관청이 있었다고 하는데, 사흘 뒤에 작년에 먼저 이곳으로 이동되어 온 일행 3명과 합류하여 전부 33명이 되었다.

 

왜 일행 3명이 이곳으로 먼저 보내어졌는지는 현존하는 자료가 없어 확인할 수 없지만, 1655년에 발생한 탈출 사건과 깊은 연관이 있으리라 추측된다.

 

 

 

“그들은 (조선에게) 무익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가에 더더욱 위험한 무리들로서 처벌을 받았다.

즉, 그들이 해를 미치게 하지 않은 지역으로의 추방이었다. 게다가 이 유배는 (조선의) 법률이 온화했음을 말해줄 뿐만 아니라, 나는 오히려 거기에 이 귀찮은 손님들에게 원만히 나라를 떠날 수 있는 기회를 주려했던 정부의 의도가 있었다는 것으로 보고 싶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비변사등록』현종 3년 정월 20일조의 기사로 확인할 수 있는데, “…제주도에 표류해 온 만인(蠻人)을 서울에 머물러 두는 것이 불편하므로 모두 전남 병영으로 옮겨 보내어…”라는 내용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서울에 둠으로써 문제의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1666년에 하멜을 포함한 8명의 일행이 일본으로 탈출 한 후, 조선 정부에서 전라도의 담당 관리를 처벌하고 있다는 것으로부터도 시볼트가 추측하고 있는 의도(원만히 나라를 떠나는 기회를 주는 것)가 조선 정부에는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히려 그들에게 탈출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은 조선에게 더욱 더 상황을 악화시키는 일이 될지도 몰랐기 때문에 있을 수 없는 의도였다.

 

 

 

실제로 그 직후인 1644년 8월 중국 선박 하나가 표착해 와 그리스도교가 승선해 있을 위험이 있다고 왜관을 통해 일본 측에 인도하여 그리스도교 5명을 적발되는 사건도 있었다.
그런데, 1653년 네덜란드인 하멜 일행 36명에 대해서는 일본 측에 인도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일본과도 하멜 일행으로 인한 외교적 문제의 소지성은 충분히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조정은 이러한 문제점을 소멸시키기 위해 전라도에 하멜 일행을 전라도에 유배시켜 그들의 존재를 숨기려고 한 것이다.

 

하멜 일행을 전라도에 유배한 뒤, 조선 정부가 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 결론을 내리는 것은 어렵지만, 아마도 유배지에서 편안한 자연사(自然死)를 바랬던 것은 아닐까라는 추측도 든다.

 

실제로 정동유(鄭東愈)『주영편』에 보면 1801년의 사건이지만, 제주에 표착한 흑인 5명을 중국으로 송환시키려 했으나, 중국 정부가 이를 거부하여 그들이 표착했던 제주도로 되돌려 보낸 사실이 있다.

 

결국 그들은 제주도에서 일생을 마치게 되는데, 이 또한 하멜 일행의 전라도 유배와 관련시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이국(異國)에 어쩔 수 없이 표착해 온 불쌍한 표류민에 대한 조선 정부의 최선의 조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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