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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국가적 차원의 관계에서 벗어난 사람(=이국인)에 대해서도 표류민 구조체제가 적용되고 있었다.
표류민은 소속하고 있는 국가와 조선 사이에 어떠한 형태로든 국제관계가 있어야만 송환되지만, 생명과 최소한의 생활 여건은 조성해 주고 있었다.
또,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능과 능력에 따라 등용시키는 경우도 많았으며, 사정에 따라서는 그들을 유폐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전자의 경우가 박연이며, 후자의 경우가 하멜 일행이었다.

 

둘째, 조선은 새로운 기술과 인력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이국인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열려있었다.
그것은 박연의 사례로 명확해지며, 적어도 하멜 일행을 전라도에 분치하기 이전인 서울의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있을 때도 같은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즉, 어디까지 그들의 기술을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지 네덜란드와 국가적 차원에서의 관계를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조선 해금체제(海禁體制)의 또 다른 기본 입장이었던 것이다.

즉, 조선을 둘러싼 네트워크망 밖의 국민과 사람들에 대해서도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열려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를 이른바 패쇄적인 이미지로서 쇄국(鎖國)이라고 평가한 일부 역사가들에 주장에 대한 반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셋째, 서양 이국인의 훈련도감 배치는 초기에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일종의 관례적인 형태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조선 정부는 그들의 군사기술과 서양식 무기에 대한 취급 능력, 또 무기 제조에 관한 능력을 높이 평가해 이를 이용하기 위해 배속시켰다.
박연과 하멜이 표착했을 당시는 명·청교체기의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고, 또 효종의 북벌정책 하에 훈련도감을 중심으로 한 군비증강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무기제조 기술에 관심이 많았다.

 

 

 

중국의 마르코 폴로와 마테오리치 등의 예수회선교사, 일본의 윌리엄 애덤스가 유명한 사례들인데, 양국은 해외 정보와 서양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이들을 등용하고 있었다.

 

일본의 학자 아라노 야스노리(荒野泰典)의 「일본형 화이질서의 형성」(日本型華夷秩序の形成)이라는 논문에 의하면, 일본의 경우, 중국인이 대명(大名)의 가신으로서 등용되기도 했으며, 또 영주 계급에 의해 기용되는 사례도 많이 보이고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히라토(平戶)에 표착한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內義隆)에 의해 기용되었다가, 후에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에게 의사로 등용된 장충(張忠)이라는 중국인과 그 자손이 좋은 예이다.

 

물론 등용의 방법과 등용된 이국인들의 역할 등에 각국의 특색이 있어 전혀 동일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능력과 기술에 따라 등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즉, 근세 동아시아 세계에서 이국인의 등용이라는 것은 그리 특별한 경우가 아니었던 것이다.

 

 

 

조선의 경우, 정보 수집 내지 사역원에서의 통역을 위한 경우도 있었는데, 대부분의 경우는 군사력 강화의 일환으로서 면이 강하게 비치고 있다.
그것은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을 거쳐 정묘·병자호란이라는 대내외적인 반란과 침략을 연이어 받고 있었고, 또 효종의 북벌정책 등에 의해 국방이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선결 과제일 수밖에 없었던 당시 조선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서양이국인으로서 박연과 하멜 일행을 생각할 때, 17세기의 명· 청교체기라는 동아시아 대변혁기에 조선의 탈중화 현상과 함께 조선형 화이의식이 형성되어간다는 시점에서 이국인 등용을 생각해본다면, 일본이 네덜란드를 복속국이라고 인식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은 이 네덜란드인들을 조선의 화이관(華夷觀) 속에 인식하고 있었다고도 평가할 수 있다.

 

네덜란드의 호붸(H. J. van Hove)씨는 『한국의 네덜란드인(Hollanders in Korea)』(Het Spectrum BV, 1989)라는 책에서 조선이 박연의 병기기술을 이용하고 있었던 것에 대해, “조선은 무기 산업이 발달하고 있지 않았었기 때문에, 박연은 장님 나라의 외눈박이 왕이었다.”고 얄궂은 촌평을 행하고 있다.


즉, 군사기술에 후진적인 조선은 장님 나라이고, 네덜란드의 일개 선원이었던 박연은 그래도 병기와 군사기술에 어느 정도의 능력이 있었기에 외눈박이 이지만, 조선의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조선에서 박연의 군사기술적인 능력이나 무기 제조술을 높이 평가한 것이겠으나, 이는 당시 조선의 병기 개발이 국가적 차원에서 얼마나 적극적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졌는지 모르고 하는 말이다.

 

당시에는 기존의 병기보다 월등한 기술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병기가 있다면, 서양의 기술만이 아니라 일본의 기술을 포함해 지역과 국가를 가리지 않고 수용하고 있었던 것인데, 단지 서양만을 대상으로 조선이 박연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봉했었다고 하는 평가에는 문제가 있다.

 

또 호붸씨의 말은 네덜란드가 당시 기술적인 면에서 우월한 위치에 있었음을 표명하고 조선을 기술 능력을 멸시하는 차원에서 언급하고 있지만, 조선의 유명한 실학자였던 이덕무(李德懋)는 그의 저서 『아정유고(雅亭遺稿)』에서 다음과 같이 네덜란드인을 평가하고 있었다.

 

깊은 눈 긴 코에 수염과 머리는 모두 붉으며, 발은 한 자 두 치인데, 항상 한 쪽 다리를 들고 오줌을 누는 것이 개와 같다.

 

이덕무는 하멜 일행이 표착한 후 시기가 조금 지난 후의 인물이지만, 위와 같은 네덜란드인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이 그러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이 바로 서양인에 대한 조선의 이(夷) 인식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에 대한 오랑캐(夷)로의 인식이 언제부터 형성되고 변화되어 갔는가에 대해 많은 연구가 필요하지만, 당시 이덕무의 인식은 이미 조선에 어느 정도 서양, 즉 남만(南蠻)이 오랑캐로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 대표적인 소재가 바로 네덜란드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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