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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박옥걸씨의 『고려시대의 귀화인 연구』에 의하면, 고려초기부터 많은 여진·거란인의 귀화가 있었고, 후기에는 몽골·일본인 등이 귀화하고 있었으며, 귀화한 인수는 고려 초기만 보아도 158회 168,499명에 이르며, 후기에는 93회 69,726명에 이른다.
또한 귀화인을 받아들인 목적은 지식인 유치와 국방 병력의 강화에 있었으며, 공적이 있는 귀화인에 대해서는 성명과 관직을 주는 등 그들에 대한 동화책을 실시하고 있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때에도 이국인 등용 사례는 여러 곳에 보인다.

 

조선 초기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여진족 출신인 이지란(李之蘭)의 등용을 들 수 있다.
그는 마천령 이북에서 다수의 여진족을 지배하며 이성계와 세력 다툼을 하고 있었는데, 결국 이성계의 휘하에 들어가 조선왕조 건국에 혁혁한 공을 세운 개국 공신이 되었다. 이러한 여진족의 등용에 대해서는 『태조실록』에만도 수 없이 등장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북방민족에 대한 기미정책의 일환이기도 하였지만, 특히 기마술과 전투에 능한 여진족은 조선의 군사력 증강에 커다란 역할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을 침략했을 때, 조선에 투항한 김충선(金忠善)이라는 인물도 있다.
그는 일본군과의 전투와 북방수비에 공을 세워 선조로부터 관직과 성명을 부여받아 조선인으로서 일생을 마친 자이다. 김충선의 일본 이름은 사야가(沙也可), 호는 모하당(慕夏堂)이며, 저명한 『모하당문집(慕夏堂文集)』이 남아있어 그의 생애를 엿볼 수 있다.

 

『모하당문집(慕夏堂文集)』에는 약간 윤색의 흔적이 있고, 또 년보(年譜)에는 오기도 보이고 있어 일본 학자들 사이에 위작의 가능성도 대두되고 있었지만, 그가 1597(선조30)년에 김응서 휘하의 항왜들과 함께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이괄의 난, 정묘·병자호란 때에도 공을 세우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김충선 외에도 그와 같은 귀화 일본인들은 『선조실록』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거의 대부분 『조선왕조실록』에는 항왜(降倭)로 표기되고 있는데, 그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침략 이후, 급증하여 조정의 허가 없이 살해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명과 일본 간의 강화교섭이 결렬된 후에는 그들에 대한 대우도 완화되어 그 수가 급증하게 되었다.

조선은 그들에게 정보를 얻거나 또는 전력(戰力)으로서 이용했는데, 『선조실록(宣祖實錄)』선조28년 정월 정유조의 기록에 의하면, 그 중에는 “자칭 왜장”, 즉 일본의 무장급인 항왜들은 검술에도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사정에도 밝아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일종의 검술교관으로 기용되고 있었다.

 

『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12년 12월 정유조의 기록에는 조정에서는 일본의 침략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들 항왜를 일본에 송환하지 않고 이용하려고 했다는 재미있는 내용이 실려 있다.

 

즉, 훈련도감의 이서와 신경진이 항왜의 자손으로 일본에 쇄환할 자들은 기예에 뛰어나 명령만 내리면 죽을 각오로 싸움에 임하며, 은혜를 베풀면 윗사람을 신애해 명을 받들고 있어 군중(軍中)에 두면 도움이 된다고 하면서, 일본은 인구가 많아 그들이 있거나 없거나 커다랗게 문제될 것은 없다고 인조에게 항왜를 이용할 것을 진언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원군으로 파견된 명군의 잔류병 중에서도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있었다고 추측되는데, 훈련도감에 배속된 이국인들 중에 박연이 서양인으로서 처음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현재 명확하게 판단할 수는 없지만, 기록상으로는 그가 최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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