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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북벌정책의 추진 중에도 민심의 동요는 늘 상존하고 있었으며, 지방 관리는 민정보다 군정에 매달리게 되었고, 중앙정계에서는 효종의 무신 세력 비호 속에서 문신과 무신간의 대립이 심화되어 문제성은 잔존하고 있었다.

 

특히, 병기의 개발과 개량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1658년 청국의 요청에 의해 참가한 나선정벌(羅禪征伐)에서 정밀한 수석식 조총을 손에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개발 작업에 들어 가보지도 못하고 사장되었을 정도로 활발했던 병기개량의 분위기도 대청관계의 개선과 함께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1653년의 전국적인 흉황으로 인해 익년에는 군비 확충보다 기민구제가 급선무로 등장하게 되었고, 1659년부터 1663년 사이의 전례 없는 가뭄과 기근으로 인한 경제적 기반의 약화는 군비 증강의 쇠퇴를 동반하게 되었다.


즉, 대외적인 면에서는 북벌정책보다 안정을 지향하게 되었고, 대내적으로는 재정난과 파벌 경쟁, 그리고 군신간의 불화가 겹쳐짐에 따라 군비 증강에 힘을 쓸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지 못했던 것이다.

 

 

 

19세기 유럽에서의 병기기술은 “percussion cap”(필자주 : 격발뇌관 장치로 소형화기의 발사를 위해 기폭제를 넣은 소형 금속제 캡)이라는 신기술이 개발됨과 동시에 탄환의 구조도 변형시켜 연속발사가 가능하게 되었다.

 

1836년에는 프랑스에서 격침(擊針)과 약협(藥莢)을 이용한 “percussion lock”이라는 뇌관식 격발장치가 발명되어 유럽에서는 병기 개발에 더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었으며, 대포 역시 말할 것도 없었다.


그 후, 소위 “아편전쟁”으로 청이 패전함에 따라 서양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어 군비강화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되지만, 이미 좁혀질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진 기술의 차이를 단기간에 극복하기는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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