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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VOC 대포

 

1664년 강도어사 민유중이 병자호란 이후, 강화부의 미곡과 화기에 대한 보유 상황을 조사하는데, 그 목록에 남만대포(南蠻大砲)라는 화기가 등장한다.


즉, 『현종개수실록』현종5년 6월 계축조에 의하면, 강화부에 있었던 화기류는 진천뢰(震天雷) 140좌, 대완구(大碗口)·대포(大砲)·중포(中砲)가 65좌, 소완구(小碗口) 30좌, 호준포 37좌, 각 보(堡)에는 대포 179좌, 진천뢰 63좌, 남만대포 12좌, 불랑기 244좌 등이 있었는데, 여기서 남만대포 12좌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비록, 12좌로 다른 화기보다 수가 적기는 하였지만, 남만대포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서양의 기술도입되었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중국에서 전래한 서양포에 대해 일반적으로 불랑기(佛狼機)라고 부르고 있었다. 불랑기(佛狼機)는 임진왜란 시기에 해당되는 1593년 정월 이후, 명에 의한 평양성 공격을 계기로 본격적인 도입이 모색되었다.


당시 사람들이 서양 기술이 도입된 대포의 호칭에 대해서 특별한 구분을 두지 않았던 게 일반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만대포와 불랑기를 구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명확히 다른 종류의 대포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조선에서는 박연을 남만인(南蠻人)이라고도 통칭하고 있었다.
또 박연이 네덜란드(=아란타, 阿蘭陀)인이라는 인식하에 “아란타(阿蘭陀)는 일명 하란(荷蘭), 홍이(紅夷), 또는 홍모(紅毛)라고도 한다.”는 내용이 『석재고』에 보이고 있으며, 이덕무의 『아정유고(雅亭遺稿)』에도 같은 내용이 보이고 있다.

 

네덜란드인홍이(紅夷), 또는 홍모(紅毛)이며, 남만(南蠻)이라고도 불렀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홍이포(紅夷砲)는 네덜란드인이 만든 것이 되며, 홍이포(紅夷砲)는 또 남만대포(南蠻大砲)이기도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강화부가 보유하고 있던 남만대포 12좌는 홍이포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강화부의 남만대포라는 것은 박연이 개량한 홍이포(紅夷砲)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

 

물론, 하멜이 표착했을 당시의 난파선 스페르붸르호에 장착되어 있던 대포도 남만대포(南蠻大砲)로 기록하고 있어 강화부의 남만대포가 하멜 일행이 표착했을 때의 대포일 가능성도 생기지만, 실은 하멜이 가지고 왔던 대포는 남한산성에 있었다.
그와 관련된 『비변사등록』숙종31년 8월 26일조의 기록을 검토해 보자.

 

이달 24일, 주강(晝講) 입시(入侍) 때에 지사 민진후가 아뢰기를, “신이 남한산성을 조사하여 돌아보았을 때, 보이기에 다르게 만든 대포가 있어, 장교들에게 물으니, 대체로 이르기를 ‘남만포(南蠻砲)로 지난날 표해인(漂海人)이 두고 간 것입니다.
때문에 조정에서 그대로 산성에 보냈습니다.

고(故) 판서 김좌명이 수어사로 있을 때, 그 (대포) 한 좌에 화약을 넣고 시험 발사했는데, 모두 파열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남은 쇠로 불랑기(佛狼機)를 주조하였고 지금도 또한 한 좌가 남아 있습니다.’고 말합니다.

설령 이 포를 시험 발사할 수 있다하더라도 불랑기(佛狼機)나 현종포(玄宗砲)와 같이 긴요하지 못합니다. 어차피 그 발사 방법도 알지 못하고, 이 무용지물을 두어 아이들이 쪼아 두드리는 것을 그대로 두는 것은 실로 의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장인을 불러 물으니, ‘이 포는 수철(水鐵)과 정철(正鐵)을 혼합하여 주조해 만들었으므로 지금 녹여서 다른 포를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만약, 불랑기와 현종포로 고쳐 만들면 옳을 듯싶으나 마음대로 하기 어렵습니다. 감히 이를 아룁니다.”하니,
이 이르기를, “아뢴 바에 따라서 고쳐 주조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이것은 남한산성에 있던 남만포(南蠻砲)에 대한 내용인데, 우선 남만포의 유입 경로를 알 수 있다.
즉, 남만포는 표해인(漂海人)이 두고 간 것으로 조정에서 남한산성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표해인은 누굴까?

 

남만포(南蠻砲)라는 명칭으로 봐서 서양인인데, 서양인 표착 사건은 두 건이 있다.
그것이 바로 박연과 하멜 일행인데, 박연의 경우 표착 당시 대포가 있었다는 기록은 안보이나, 하멜 일행이 표착할 당시에는 대포가 있었다.

 

이익태의 『지영록(地瀛錄)』에서 하멜 일행의 대·중·소·포 등의 물건을 모두 제주목의 무기고에 유치시키고 있었다는 기술, 또 성해응의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의 스페르붸르호 난파선의 목록을 기록한 내용 및 무기가 모두 무기고로 옮겨졌다는 기술로부터도 확인할 수 있다.
하멜이 표착했을 당시에 그들의 대포는 모두 제주목의 무기고로 옮겨졌지만, 그 후 남한산성으로 이송되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위의 기록에 보이는 남만포는 1653년 하멜 일행이 표착했을 때 가져온 것으로 2문 중에서 1문은 수어사 김좌명이 시험발사 도중에 파열되었고, 나머지 1문은 불랑기를 만들어 1문만이 남아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이 1705년까지는 아직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남만포는 발사방법도 모르며, 이 무용지물을 아이들이 두드리며 놀게 놓아두는 것은 의미가 없으니, 불랑기와 현종포로 만드는 것이 좋다는 민진후의 진언에 따라 녹여서 새로운 포로 만들 것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 남만포의 철을 이용해 새로운 대포를 만들지는 못했다.
1707년인 『비변사등록』숙종33년 2월21일조의 기록을 보면, 남만포 1문은 다른 병기를 주조해보았자 대단한 것은 못되므로 차후의 대포제작에 이용하기 위하여 남겨두도록 하였던 것이다.

 

 

 

 

즉, 『영조실록』영조7년 9월 신사조에 기록된 훈련도감의 보고 기록으로서, 여기에는

 

“본국(훈련도감)에서 새로 마련한 동포(銅砲)가 50이고, 홍이포가 둘인데, 그것을 싣는 수레는 52폭입니다. 동포(銅砲)의 탄환거리는 2천여보이며, 홍이포의 탄환거리는 10여리(里)나 되니, 이는 실로 위급한 시기에 사용할 만한 것입니다.
홍이포는 바로 우리나라에서 새로 만든 것으로 예람(睿覽)하시도록 올리니 강동한(監董)한 자들의 노고를 기록해 주소서.”
라는 내용이 보이고 있어 조선에서의 홍이포 제작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기록은 1731(영조7)년의 일로서 시기적으로 당시의 홍이포 제작에 박연이 관여하고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아마, 이것은 주지한 바와 같이 1707(숙종33)년 남겨둔 하멜 일행의 남만대포 1문의 개량품이 아니면 박연이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있을 당시 제작했다고 여겨지는 강화부 남만대포의 개량품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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