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하멜정보관>서울생활>박연의 홍이포 제작>외인부대장 박연과 홍이포

네덜란드 VOC 대포

 

서양 이국인이 조선에 표착했을 때, 서울 상경과 훈련도감 배속은 당초에 조선 정부의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행해진 것이지만, 그 외에도 또 다른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당시의 조선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침략전쟁인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의해 전국토가 황폐해 있었으며, 그 상처가 아물 틈도 없이 국내에서는 이괄의 난이 일어났고, 또 북방에서는 여진이 흥기하여 그 뒤에 두 번에 걸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청의 침략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17세기 후반까지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박연과 함께 조선에 표착한 3명은 청의 제2차 침입인 병자호란 때, 전투에 참전하여 동료 두 명은 전사하고, 박연만이 살아남게 되는 것이다.

 

 

 

훈련도감은 원래 전쟁에 필요한 화포의 취급과 연습 및 사격 훈련에 중점을 두고 있던 기관이었는데, 조선은 병기 개발을 위해 신기술을 도입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박연과 같은 서양 이국인배속시키고 있었다.
이에 관한 역사적 사실은 윤행임의 『석재고(碩齋稿)』(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에 명확히 나타나 있다.

 

박연은 하란타(河蘭陀, 네덜란드)인이다. 숭정(崇禎) 원년에 호남(湖南)에 표류해 왔다. 조정에서는 훈국(訓局, 훈련도감)에 예속시켜 항왜(降倭)와 표류해 온 한인(漢人, 중국인)을 거느리게 했다. 박연의 이름은 호탄만(胡呑萬)이다. 병서에 재주가 있고, 화포를 매우 정교하게 만들 수 있었다. …박연은 나라를 위해 그 재능을 살려 드디어 홍이포의 제(制)를 전하였다. 기이한 일이다.

 

우선, 박연이 숭정(崇禎) 원년, 즉 1628년 호남에 표착해왔다고 하며, 그 후 조정에서는 그를 훈련도감에 배속시켜 항왜와 중국인을 거느리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하멜은 1653년 제주에 표착하고 있으며, 이 기록에서 호남이라고 한 것은 당시 제주가 전라도 관할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 기록은 훈련도감에 배속시킬만한 박연의 뛰어난 능력을 언급하고 있는데, 바로 병서에 재주가 있고, 화포를 매우 정교하게 만들 수 있다는 부분이다.


뿐만 아니라, 효종의 부마(駙馬, 사위)였던 정재륜이 기록한 『한거만록(閑居漫錄)』(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에는 박연에 대해, “위인이 뛰어나고 훌륭하며, 깊이 헤아리는 바가 있었다.”라고 그를 평가하고 있다.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조선을 위해 재능을 살려 “홍이포를 만드는 법(紅夷砲의 制)”을 전해준 것이다.

 

 

 

레드야드에 의하면, 스미트(Jacob Smit)의 견해를 인용해 “호탄만(胡呑萬)”의 한글 발음은 네덜란드어로 대장을 의미하는 단어일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는데, 이는 박연의 지위를 해명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로서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네덜란드어 단어 중에는 “hoofdman”(호프트먼), “hopman”(호프먼)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분명히 “leader”(지도자), “chief”(장, 우두머리, 두목, 장관) 등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네덜란드어의 어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 독일어에도 “Hauptmann”이라는 단어가 있어 “대위(육군·공군), 중대장, 부대장, 용병의 대장” 등의 의미가 있다.

 

호탄만(胡呑萬)이라는 호칭의 유래는 아마도 박연과 함께 표착했던 동료 2명이 박연을 호탄만이라고 불러, 이것을 박연의 본명으로 들었던 당시의 조선 사람들이 그 한자명을 호탄만(胡呑萬)이라고 표기했을 가능성이 많다고 추측된다.

 

아무튼 박연은 호탄만이라고 불릴 정도로 화포 제작에 대한 능력을 소지하고 있었고, 또 이러한 그의 능력을 살려 홍이포(紅夷砲)의 제작법까지 조선에 전해준 것이다.
박연이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실제로 항왜(降倭)와 귀화한 중국인들로 구성된 일종의 외인부대장 이기도 했었기에 어느 의미에서 본다면, 호탄만이라는 명칭은 그에게만 붙여질 당연한 명칭이었을지도 모른다.

 

 

 

『인조실록』인조26년 8월 정사조에는 “정시(庭試)를 시행하여 문과에 이정기(李廷夔) 등 9인과 무과에 박연(朴淵) 등 94인을 뽑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본조등과총목(本朝登科總目)」에도 정시(庭試)에 표를 시험하여 이정기(李廷夔) 등 9인을 뽑았는데, 박연(朴淵)이 장원이 되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여기에 보이는 박연(朴淵)이 네덜란드인 박연인가에 대해 명확히 단정지울 수는 없지만, 박연이 조선 이름으로 박연(朴燕·朴延·朴淵), 박인(朴仁) 등으로 불려 왔고, 또 박연이 생존하여 있었던 1648년의 시기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납득할 만한 사료이기도 하다.

 

즉, 박연은 병기와 병술에 관한 능력으로 인해 무과에 급제한 것이고, 또 1627년에 표착하여 21년이 지난 시점으로 충분히 언어상의 문제도 해결된 만큼 과거를 통한 정식 등용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나의위치:하멜정보관>서울생활>박연의 홍이포 제작>외인부대장 박연과 홍이포 인쇄하기


카피라이트로고

이용안내 개인정보보호정책 홈페이지개선접수
뷰어프로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