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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사건은 청국 사신에게 뇌물을 주고, 매수하는 방편으로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지만, 조선 정부에게 역시 있어서는 안 될 귀찮은 사건이기도 했다.

후에 이 탈출사건의 주범격인 일등항해사포수옥사해 버렸다. 하멜은 자연사인지 처형을 당했는지 모르겠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이와 관련된 조선 측의 사료를 검토해보면 흥미롭고도 새로운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다.

 

훈련도감에서 아뢰기를, “남만인(南蠻人)이 청국 사신의 행렬에 뛰어들었는데, 일직이 예기치 못한 일입니다.
소식을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뛰어든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기 위해 즉시 남만인을 불러 점호를 해보았더니, 그들 중에 남북산(南北山)과 남이안(南二安) 두 사람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후에 원접사(遠接使)의 장계를 받고나서 비로소 뛰어든 자가 남북산(南北山)이고 달아난 자가 남이안(南二安)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뛰어든 자는 접어두고라도 달아난 자는 즉시 쫓아가서 잡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기패(旗牌) 등의 관원을 따로 정해 각기 군인을 인솔케 하여 창의문 안팎의 여러 산들을 수색하도록 하고 성안의 주요 도로도 염탐하여 조사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동영(東營)에 근무하던 군병이 동소문(東小門)의 노상에서 이안(二安, 남이안)을 발견하여 발에 족쇄를 채우고 보고해 왔습니다. 칼과 족쇄를 채워 죄인을 옥에 가두는 것에 대해 감히 여쭙습니다.” 전하여 말하기를 “알았다. 잘 타일러서 그 마음을 안심시키는 것이 좋으며, 한편으로는 그의 행동거지를 잘 살피라.”고 하였다.

 

이 기록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효종 6년 3월15일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훈련도감의 보고를 받은 내용을 전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기록으로부터 도망친 일행의 조선 이름과 함께 그들이 누구인가가 밝혀졌다.
『하멜보고서』에는 이 두 사람을 일등항해사 헨드릭 양스(Hendrik Janse)와 포수 헨드릭 얀스 보스(Hendrik Janse Bos)라 하였고, 청국 사신에게 붙잡혀간 것은 항해사라고 했다.


또, 『승정원일기』의 기록에서는 청국 사신 행렬에 뛰어든 자가 남북산(南北山)이고 달아난 자가 남이안(南二安)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 두 기록을 비교해보면, 남북산(南北山)은 항해사 헨드릭 양스이고, 도망친 남이안(南二安)이 헨드릭 얀스 보스였던 것이다.
남북산(南北山)은 그 자리에서 붙잡혔으나, 남이안(南二安)은 그대로 도망쳐 결국은 서울의 동소문의 노상에서 붙잡혀, 두 사람은 감옥에 투옥되어 사망한 것이다.

 

『하멜보고서』에는 명확한 사망 원인이 밝혀져 있지 않으나, 『효종실록』효종 6년 4월 기묘조에는 남북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당초에 남만인(南蠻人) 30여 인이 표류하여 제주에 이르러 목사 이원진(李元鎭)이 붙잡아서 서울로 보내었다. 조정에서 급료를 주고 도감(都監, 훈련도감)의 군오(軍伍)에 나누어 예속시켰다.
청나라 사신이 왔을 때에 남북산(南北山)이라는 자가 노상에서 직소(直訴)하여 고국으로 돌려보내 주기를 청하니, 청국 사신이 크게 놀라 본국을 시켜 잡아 두고 기다리게 하였다. 남북산(南北山)이 초조하여 먹지 않고 죽으니 조정이 매우 근심하였으나, 청국 사람들이 끝내 묻지 않았다.

 

즉, 남북산(南北山)이라는 이름의 항해사 헨드릭 양세는 감옥에서 초조해하다가 아무것도 먹지 않아 병사 한 것이었다. 이국땅에서 탈출에 실패해 감옥에 갇히게 되자 너무나 초조해한 나머지 식음을 전폐해 병사한 것이다.
남이안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없어 확인할 길은 없다.

 

 

 

하멜일행이 탈출사건과 함께 청국 사신에게 본국송환을 직소하는 사건을 일으키기는 하였지만, 사형으로서 처벌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청국 사신이 소동을 일으킨 네덜란드인 두 명을 잡아두고 청국(또는 청국 사신)의 지시를 기다리도록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국 사신부터 이 탈출사건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문책도 없었다. 그것은 『하멜 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청국 사신에게 뇌물을 주어 사건 차제를 문제화시키지 않는 은폐 작전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우선 하멜일행은 이 사건을 사전에 알고 있었는지 어떤지에 대해 심문을 받는 뒤에, 도주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기 위해 한 사람 당 곤장 50대의 처벌을 명받았다.
이 처벌은 효종이 하멜일행이 어쩔 수 없이 풍랑에 떠밀려온 것이지 약탈을 목적으로 온 것은 아니니 살려두라는 지시에 의해 취소되었다.
하지만, 그 후의 하멜일행에 대한 조선의 경계는 냉엄해지고, 사건의 뒤에 2회에 걸친 청국 사신의 입성이 있었으나, 이때에도 엄중히 감금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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