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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그들이 가지고 있던 서양의 병기 기술은 그 나름대로 평가를 받아 효종의 북벌정책 하에서는 훈련도감에도 배속되기는 했지만, 서양의 이국인이 35명씩이나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훈련을 받고 있었다는 것은 청국의 의심을 사게 되고 나아가 북벌정책에 지장을 초래할 위험성이 충분히 있었다.(제주도에 표착했을 당시는 36명이나 한 명은 서울로 이송하던 중 영암에서 사망)

 

하멜일행의 서울 체제 중에 4번에 걸친 청국 사신의 서울 방문이 있었다.
우선, 1654년에 사신이 입성한 시기는 사신들이 서울에 체재하고 있던 8월부터 9월 초순까지 남한산성에서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1655년 3월에 청국 사신이 서울을 방문했을 때, 조선 정부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그 전과 마찬가지로 하멜일행은 외출이 금지되고, 위반할 경우 엄벌에 처한다는 지시가 내려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행 중의 두 사람이 거류지를 탈출해 청국 사신의 귀국 행렬에 뛰어들어 자신들을 네덜란드 본국으로 송환해줄 것을 요청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1655년 3월 청국 사신의 일행이 다시 서울로 왔다.
우리는 이 기간 동안에 외출을 금지한다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사신이 떠나려던 날, 우리 일행 중 암스테르담 출신 일등항해사 헨드릭 양스(Hendrik Janse)와 할렘 출신의 포수 헨드릭 얀스 보스(Hendrik Janse Bos)가 땔감을 구하러 가는 척 하다가 숲으로 가서 청국 사신이 지나가는 길목에 숨어 기다렸다.
수백 명의 기병과 보병의 호위를 받으며 사신이 지나가자 그들은 행렬을 헤치고 나아가 사신이 탄 말머리를 붙잡았다. 그들은 조선 의복을 벗고 안에 입고 있던 네덜란드 복장을 보여주었다. 순식간에 일대 혼란이 일어나 우왕좌왕하여 수라장으로 변했다.

 

청국의 사신은 그들에게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으나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다. 사신은 자신들이 묵게 될 곳으로 항해사를 같이 데려오도록 명령했다. 사신은 그를 호위하고 온 병사에게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왕은 즉시 박연(벨테브레)를 그곳으로 보냈다.

 

우리들 또한 왕국으로 끌려가 대신들 앞에 서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 일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를 물었다. 우리는 이일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신들은 이 두 사람이 외출한 것을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우리를 처벌했다. 판결은 각각 곤장 50대씩이었다.
보고를 받은 왕은 우리가 폭풍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이지 도둑질이나 혹은 약탈을 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고 하여 그 처벌을 승인하지 않았다. 왕은 우리를 숙소로 돌려보내고 그곳에서 다음 지시를 기다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항해사가 벨테브레와 함께 청국 사신에게 가자 청국 사신은 이런 저런 일에 대해서 조사를 받았다. 그러는 사이에 왕과 조정의 대신들은 파선된 배에서 건져낸 총과 화물을 공물로 바쳐야만 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이 불상사가 중국 황제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청국 사신에게 많은 돈을 뇌물로 주어 일을 적당히 수습하는 방향으로 마무리 지었다.

 

우리의 동료 두 사람은 서울로 압송되어 곧바로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들은 얼마 후 옥중에서 죽었다.

수감 중 단 한번의 면회도 허락되지 않았고, 심지어는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금지령이 내렸던 관계로 그들이 자연사로 죽었는지 혹은 사형을 당했는지 조차도 확인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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