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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박연이라는 네덜란드인이 1627년부터 조선에 체제하고 있기는 하지만, 한두 명도 아닌 35명씩이나 서울에 있다는 것은 조선 사람들에게도 놀랍고도 진기한 일종의 볼거리였다.

 

때문에 『효종실록』효종 4년 8월 무진조와 『하멜보고서』에 의하면, 효종은 가끔 일행을 궁정으로 불러들여 네덜란드의 고전 춤과 노래를 부르도록 시키기도 하였고, 또는 묘기나 자랑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더욱이 효종뿐만이 아니라, 서울의 고위관료들도 일행을 자주 불렀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의 부인과 자녀들이 하멜일행을 보고 싶어 안달을 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를 하멜은 그의 보고서에 밝히고 있는데, 바로 제주도 사람들이 자신들에 대해 생김새가 사람보다는 괴물에 가깝고, 무언가를 마실 때에는 코를 등 뒤로 제쳐두며, 머리카락이 금발이라는 소문을 퍼트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조선인에게 코가 큰 서양인은 신기했으며, 또 그것을 과장되게 표현한 부분이 재미있다.

 

 

 

하멜일행은 구경꾼들 때문에 집에서 조차도 편히 쉴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하인들까지도 자기들의 숙소로 불러내 놀려댔다고 하멜은 고백하고 있다.
때문에 이것이 문제가 되어 훈련대장은 하멜일행에 대해 일반인들과 접촉하는 것을 금지하였고, 그의 허락 없이는 그 어떤 누구도 하멜일행과 접촉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것은 바로 남한산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멜에 의하면 아주 견고한 요새로 전시에는 국왕의 피난처로 쓰이기도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여기에서 9월 2~3까지 머물렀는데, 왜 그들을 여기로 이동시킨 것일까?

 

그것은 바로 청국 사신이 서울에 왔기 때문이다.
1627년과 1636년 두 차례에 걸친 청국의 침략으로 조선은 청의 조공책봉 체제 하에 편입되었고, 청에 의한 외교적 간섭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하멜일행과 같은 네덜란드인이 그것도 35명씩이나 서울에 체제하고 있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조선 정부의 입장으로서도 그들의 표착에 대해 청국에 알리지 않았던 것, 그리고 왜 서양이국인을 서울에 체재시키고 있었는가에 대해 불필요한 설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하멜보고서』에 의하면 1654년 서울의 겨울은 혹독한 추위였다.
11월말부터 한강이 꽁꽁 얼어 말 200~300마리가 줄을 지어 건널 수 있을 정도로 얼어버렸다.
12월에는 너무나 강한 추위에 하멜일행을 측은히 생각한 훈련대장이 왕에게 상서하여, 그들이 제주에 표착할 당시 스페르붸르호의 화물이었던 녹피가 지급되기도 했으나, 임비 녹피는 썩거나 좀이 슬어 버린 것들이었다.

 

그중에서 쓸 만한 것을 골라 팔아 추위를 이겨내기 위한 물품을 구입할 것을 허락 받았지만, 일행은 그 수입으로 집을 사기로 결정하였다. 왜냐하면, 그 때 살고 있던 집주인이 겨울의 땔감용 나무를 해오라고, 혹독한 추위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3마일이 넘는 산길을 왕복하는 고통을 주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각자 어느 정도씩의 자금을 각출해 서울에서 작은 집을 구입하였고, 나머지는 옷을 사서 그 해 겨울을 극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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