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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일행의 효종 알현

 

 

서울에 도착해서는 우선 사역원에서 거처하게 하였으나, 도착한 직후인 6월27일에는 비변사에서 다음과 같이 하멜일행에 대한 새로운 조치가 취해졌다(『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효종5년 5월 13일조).

 

아뢰어 말하기를, “신 등이 빈청에 와서 만나 박연을 불러서 물어 보았더니, 즉 이 사람들은 한 곳에 함께 있도록 해서는 안 되니, 각기 보증인에게 주어 서로 가까운 여염집에 흩어져 있게 하고, 때로는 왕래하면서 서로 보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전에 결정한 바에 따라 훈국(訓局, 훈련도감)에 이름을 예속시켜 박연으로 하여금 장관(將官)을 정해 거느리게 하여 기예를 교습시키고, 료포(料布. 일종의 급료)는 훈국에서 포수(砲手)의 예에 의해 지급하며, 보증인에게 주기 전에는 그대로 사역원에 머물게 하여 박연으로 하여금 줄만 한 사람을 찾아보도록 한 연후에 찾는 대로 보내야 마땅합니다. 여러 사람의 의논이 이와 같으니 이로써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이 기록은 1654년 5월13일조의 기록으로 양력으로는 1654년 6월27일이 되는데, 중요한 것은 그들을 한 곳에 모아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즉 보증인에게 넘겨주어 여염집, 즉 일반 민가에 흩어져 거쳐하게 했다는 점이다. 이는 제주도에서의 탈출 사건과 같은 일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하지만, 아직 보증인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사역원에 머물게 한다는 방침도 정해졌다.
실제로 『하멜보고서』에는 서울에 도착해 2~3일간은 동료들과 함께 머물었으나, 그 후 한 집에 두세 명, 혹은 네 명씩 나뉘어져 중국에서 도망쳐와 서울에 살고 있는 중국인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중국인이라는 것이 바로 중국어 통역사들이다.

 

 

 

이와 관련해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하멜표착기사로 유명한 『지영록(地瀛錄)』「서양국표인기(西洋國漂人記)」에는 하멜일행이 박연에게 일본으로의 송환을 요청했을 때, “서울로 올라가 도감(훈련도감)의 포수로 입속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회유한 것이 그대로 실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박연의 의도대로 하멜일행의 표착처리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또 보증인을 찾기 전에는 사역원에 머무르지만, 그 보증인을 찾게 하는 일조차 박연에게 맡기고 있다.
그것은 1627년 박연이 조선에 표착하고 난 후, 오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정에 상당한 신용을 얻고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며, 조선인으로 동화되어 간 박연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박연은 이미 네덜란드인이 아니라 조선인으로서 제 2의 인생을 조선에서 꾸려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훈련도감이 있던 자리(현, 동대문운동장)아무튼 하멜일행은 서울에서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군사로서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생활상이 구체적으로 어떠했는가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자료는 아직 없지만, 『하멜보고서』와 일부 개인문집, 또는 조선왕조의 관련기록으로부터 몇 가지 사실은 밝혀낼 수 있다.

 

 

 

 

조선시대 호패여기서 말한 둥근 나무판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호패(號牌)이다.

즉, 그들은 그때부터 조선인으로서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실제로 그들 중에는 “남북산(南北山)”과 “남이안(南二安)”이라는 조선식의 이름을 가진 자들이 있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효종 6년 3월15일조에 의하면, 서울 체재 중에 하멜일행 중의 두 사람이 탈출 사건을 일으키는데, 그들이 바로 “남북산(南北山)”과 “남이안(南二安)”이다. 이들이 남씨(南氏) 성을 가지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지는 않으나, 조선시대에는 서양인을 남만인(南蠻人)이라고도 불렀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과의 관련성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즉, 국가적 관계에서는 서양과의 접촉을 기피하려는 면이 없지 않아 있었으나, 서양인, 또는 서양의 기술과 학문에 대해서는 폭 넓게 수용하려고 했던 조선의 정책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것이 바로 조선의 이국인 등용정책으로 박연도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입장에서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조선의 군사력강화에 기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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