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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일행의 서울압송

 

이원진은 하멜 일행이 표착했을 당시부터 친절과 우호로서 대접해주었지만, 하멜 일행의 표착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목사의 임기를 마쳤고, 곧이어 중앙의 우승지가 되어 서울로 상경하고 있었다.


물론, 그는 제주목사 재임기간 중에 하멜 일행에 대해 우호적인 접대를 행하였는데, 조정으로 관직을 옮긴 후에도 그들의 구제문제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효종5년 2월24일조에서 그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이번 달 23일 인견할 때, 우승지 이원진이 아뢰기를, “서양국 사람을 구제하여 살리는 것에 대해, 대신이 입시할 때 다시 품달하여 처리하라고 전교하셨습니다. 오늘 대신이 입시하였으니 상의하여 그것을 처리함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인의 표류하여 이르렀으니, 비록 귀순해 온 것이 아니다 하더라도, 또한 마땅히 살릴 수 있는 제활(濟活)의 길이 있을 것이다. 듣자니 도중(島中, 제주도)에 기근이 들어 살아갈 도리가 매우 어렵다고 하니, 어찌해야 하겠는가.”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관가의 곡식으로 먹이는 것을 계속하기 어려운 형세이니 육지로 거느리고 와서 생계를 꾸려가게 하는 것이 또한 무방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성(京城, 서울)으로 거느리고 와서 훈국(訓局, 훈련도감)에 이름을 예속시켜 편하게 살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그들의 물화(物貨)는 오는 배편에 부쳐 싣게 하고, 그들은 육지로 거느리고 오게 하지만, 지나치는 각 관에서 먹을 양식을 제공케 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하니, 상이 아뢰기를,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

 

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우승지가 된 이원진은 하멜 일행의 구제문제를 조정에서 다시 논의할 것을 진언하였는데, 효종은 그들이 귀순해온 것은 아니지만, 살릴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이라는 의향을 표명하고 있다.

 

동시에 제주의 기근을 이유로 그들에 대한 처리를 조신들에게 묻고 있었는데, 영의정 정태화는 제주의 관곡으로 그들을 먹이기 힘드니 서울로 상경시키는 것도 무방하다고 하자, 효종도 훈련도감에 예속시켜 편히 살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계속된 정태화의 진언에 의해 하멜 일행의 물화(스페르붸르호의 선적물)는 배편을 이용해 옮길 것과 일행의 이송 중에 양식 제공 등이 결정되었다.

 

 

 

바로 이국에서 난파를 당해 어쩔 수 없는 고난을 겪고 있는 표류민에 대한 인도주의적인 구제 조치를 조선 정부가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효종은 그들에게 “살릴 수 있는 길(濟活之道)”이 있을 것이라 했고, 제주의 기근까지 염려하여 서울로 상경시키려 했으며, 나아가 훈련도감에 배속시켜 편안한 생활을 부여해 주고자 했던 것이다.

 

하멜 일행의 표착처리가 인도주의적인 입장에서 처리되고 있었다는 것은 조선의 서양 이국인에 대한 기본적인 성격을 다른 무엇보다도 극명하게 보여주는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 다음 날에는 해남(원문:Heijnam)에 도착하여 다른 배에 승선하고 있던 일행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다음날은 다시 출발하여 영암(원문:Ieham)에 도착하였는데, 일행 중의 한 명인 폴러스 얀스 쿨(Poulus Janse Cool)이 표착할 당시의 부상으로 말미암아 사망하여 하멜 일행은 전부 35명이 되었다. 사망자를 일행의 참배 하에 매장한 후에 다시 출발해 저녁에는 나주(원문:Naedjoo)에 도착하였다.

 

또 다음 날 아침에 출발해 장성(원문:Sansiangh)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에는 장성을 떠나 입안산성(Jipamsansiang)이라는 커다란 산성이 있는 곳을 지나, 정읍(원문:Tiongop)에서 여장을 풀었고, 다음 날에 태인(원문:Teijn)에 다다르고 있었다.

 

또 다음 날 아침 무렵에 다시 말을 타고 출발해 오후 무렵에는 금구(원문:Kumge)에 도착하고 있었으며, 점심을 먹고 다시 출발해 밤에 전주(원문:Chentio)에 도착했다. 『하멜보고서』에는 전주에 대해서 이전에는 왕국의 수도였는데, 지금은 전라도(원문:THiellado) 감사가 주재하는 오래된 도시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다음 날에는 전주를 출발해 저녁에 여산(원문:Jesaen)에 도착하고 있는데, 하멜은 이 여산을 전라도의 마지막 도시라고 했다.
다음 날 아침에는 여산에서 말을 타고 이동하기 시작해 충청도(원문:Tiongsiangdo) 내의 은진(원문:Gunjin)에서 여장을 풀었고, 그 다음 날 연산(원문:Jensaen)에서 머무르다가, 다음 날에 충청감사의 관청이 자리잡고 있던 공주(원문:Congtio)에 도착하였다.

 

다시 다음 날에는 큰 강을 건너 경기도(원문:Senggado)에 도착하였으며, 다시 수일을 지나 큰 강, 즉 한강을 건너 서울에 도착하였던 것이다.

 

 

 

정확한 출발일을 명기한 자료가 없지만, 다음에 보이는 『비변사등록』효종 5년 5월12일의 기록으로부터 서울에 도착한 시기를 확정지을 수 있다.

 

아뢰기를, “박연(朴延)이 거느리고 온 여러 사람(하멜 일행)이 지금 이미 서울에 들어 왔으니 즉시 사역원(司譯院)에서 거처하게 해야 합니다.
오늘부터 날짜를 헤아려 급료(給料)를 주고, 군인을 많이 정하여 수직(守直)하는 것을 병조로 하여금 적당히 헤아려 거행케 하고, 이후에 처리할 일을 널리 의논해 품정(稟定)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하였다.

 

즉, 이 기록을 볼 때, 하멜 일행은 박연이 거느리고 서울에 상경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은 효종 5년 5월12일의 음력날짜이므로, 내용상 이미 하멜 일행이 서울에 들어와 있다는 것으로 볼 때, 양력으로 환산하면, 1654년 6월26일 금요일이 되며, 따라서 6월 26일 또는 그 이전에 일행은 서울에 도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그들이 서울에 도착해서는 사역원에 거처를 두고 있음도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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