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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록』『효종실록』의 기록에서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하멜일행이 제주에 표착할 당시의 많은 상황 등을 파악할 수 있다.

 

 

 

①『지영록』에서 하멜 일행의 표착일은 구력으로 1653년 7월24일 임을 확인할 수 있다.
서기로는 1653년 8월16일로 『하멜보고서』의 난파 일자와 일치한다.

 

②『지영록』에서 그들의 정확한 표착 위치를 비롯한 난파의 피해 상황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기록에는 생존자가 36명인데, 『효종실록』에서는 38명으로 되어 있다. 이것에 대해 『효종실록』의 오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사실은 정확한 기술이다. 왜냐하면, 『지영록』의 기록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표착 직후 사망했으리라 추정되는 2명의 병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③ 표착 당시의 통역 사정과 조정에 대한 보고이다.
서양 이국인들이 제주에 표착해 오자 이들에 대한 조사를 진행시키나, 『지영록』에 보이는 바와 같이 중국어·일본어 통사 및 류큐(琉球)에 표류했다가 돌아온 자도 말이 통하지 않아 조사를 진행시킬 수 없었으며, 생김새가 남만인(서양인)이라는 의심이 들어 조정에 보고를 하여 박연이 파견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효종실록』에 따르면 일본어를 아는 자를 통해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리스도인가라는 질문에 “야야(耶耶)”라고 대답하고 있는데, 이것은 네덜란드어로 “jaja(발음은 야야)”이며, “Yes, Yes”를 의미한다. 즉, 하멜일행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임을 표명했으나, 조선 측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 『효종실록』의 기록을 통해 하멜일행의 목적지가 낭가삭기(郞可朔其), 즉 나가사키(長崎)임이 밝혀졌으나, 당시 조정에서 명확히 나가사키에 대한 인식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이 사료로 확인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목적지가 일본이었다는 것은 확인하고 있었다.

 

 

 

① 우선, 『지영록』에서 박연이 제주도에 파견되어 하멜일행의 3명과 대면한 후, 그들이 같은 네덜란드인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참고로 『하멜보고서』에도 박연과 하멜일행이 대면한 모습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에 의하면 박연이 하멜일행과 대면한 시기는 1653년 10월29일이다.

 

② 박연을 통해서 하멜일행에 대한 조사가 시작된 것은 『지영록』에 보이는 기록, 즉 “다음 날 박연은 만인들을 모두 불러 자기가 살고 있던 지명을 각각 말하게 하였는데, 모두가 남만 땅에 살고 있었다.”라는 기술로 알 수 있듯이 박연과 하멜일행이 처음으로 대면한 다음 날인 10월30일었다.
이 조사에 의해 전원이 네덜란드인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런데, 일행 중에 불과 13세의 너넷고불센(Denijs Govertszen)이라는 아이는 네덜란드에서 박연이 거주하고 있던 곳의 가까운 곳에 살았기 때문에 박연은 자신의 친족에 대해서 물었다. 그러나 집은 부서졌으며, 아저씨는 이미 사망하였고, 다만 친족만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비통해 했다는 것이다.
이국에서 친족의 소식을 들었던 박연의 안쓰러운 마음과 슬픔이 전해지는 대목이다.

 

③ 『지영록』의 기록으로 하멜일행은 사탕·후추·목향 등을 가지고 도안도(道安島, 타이완)에 가서 그곳에서 녹피를 구입해 중국에다 팔고 있으며, 후에는 일본에 가서 목향으로 왜화(倭貨, 일본 은)를 교환하는 장사를 할 예정이었는데, 도중 악풍에 만나 조선에 표착하였다는 경위가 밝혀졌다.

다시 말하면 하멜일행은 동아시아 해역에서 중개무역을 하고 있었으며, 일본으로 향하던 도중에 표착한 것을 조선도 알게 되었던 것이다.

 

 

 

①『지영록』의 기록으로부터 박연과 하멜 일행의 대면하면서 송환교섭에 대한 재미있는 대화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즉, 하멜일행이 자신들을 살려서 일본에 보내주면, 곧 네덜란드의 많은 상선이 조선에 올 것이기 때문에 박연도 그 편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일본으로의 송환 요청을 한 것이다.

 

그러나 박연은 단호했다.
그는 일본에 열린 곳은 나가사키(長崎)뿐이며, 교역이 전과 달라 타국의 상선이 하륙하는 것을 금지하고, 자국인이라도 타국과 왕래하는 자는 죽인다고 하며 적극적으로 하멜일행의 송환 요청을 만류하고 있다.

 

이전에 자신도 인조를 비롯한 고관과 대면했을 때, 일본으로의 송환을 요청하고 있었지만, “네가 새라면 그곳에 날아갈 수 있겠지만, 우리들은 외국인을 우리나라 밖으로 내보내지 않기 때문에 너는 식량과 의복을 받아 이 나라에서 일생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된다.”(『하멜보고서』)는 답변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의 경험으로부터 하멜일행의 일본 송환을 간곡히 만류하였다는 추측도 든다.

 

더욱이 자신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 훈련도감의 포수로 입속하여 의식에 걱정 없이 몸을 안전하게 하느니만 못하다고 하며 그들을 오히려 감언으로 회유하였던 것이다.
박연이 조선에 표착한 후 조선 정부에 의해 어느 정도 대접을 받고 있었는지 가늠케 해주는 부분인데, 아무튼 하멜일행은 박연의 이러한 회유에 어쩔 수 없이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박연은 이미 조선인으로서, 또 조선의 관리로서 서양 이국인에 대한 표착 처리를 행하고 있었다는 점이 더더욱 박연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박연의 태도에 대해 하멜의 그의 보고서에서 “통역을 구했다는 우리의 기쁨은 곧 슬픔으로 바뀌었다.”고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었다.

 

② 하멜일행에 대한 서울로의 이송 결정에 대한 부분이다.
박연을 통해서 심문한 내용들은 조정에 보고되어 그들의 처리에 대한 조정의 지시를 기다리게 되었다.
『효종실록』에는 서울 상경을 명하고 있는데, 잘못 이해를 할 경우, 박연을 파견할 때, 서울로의 이송을 지시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실제는 박연을 제주에 파견하고 하멜일행에 관한 조사보고를 기다렸다가 서울로의 이송을 명령한 것이다.

 

『하멜보고서』에는 박연이 그들에 대해 심문하고 그 상세한 내용이 신중하게 작성되어 조정에 보고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1654년 5월말에 국왕의 답서를 기다려 서울로의 이송이 결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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