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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일행이 제주도에 체재하면서 놀랄만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같은 동포인 네덜란드인 박연(벨테브레)이 1627년 조선에 이미 표착해 와 있었고, 또 자신들의 통역을 위해 서울에서 제주로 파견되었다는 것이다.
이국 땅에 표착해 와 자신과 같은 동포를 만난 하멜일행도 감격에 겨웠을 것이지만, 1627년에 표착하여 약 27년이 지난 후에 동포를 만난 박연의 마음은 더더욱 감격에 가슴이 벅차 왔을 것이다.

 

실제로 『지영록(地瀛錄)』과 『하멜보고서』에는 그러한 모습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그 상봉 모습과 박연을 파견해 하멜일행을 조사케 한 조선 정부의 의도를 『효종실록』의 기록과 아울러 살펴보도록 하자.

 

 

당시의 목사는 이원진, 판관은 노정, 대정현감은 권극중이다.

계사년 7월24일 서양국 만인 등 64명이 한 배에 동승하여 대정현 지방 차귀진하 대야수 연변에

서 부서졌다. 익사자가 26명, 병사자 2명, 생존자가 36명이고, 옷을 입은 것이 검정, 흰색, 빨강의 세 가지 색깔이 서로 섞여있었다.
머리를 모아 서로 맞대고, 웅크려있거나 서기도 하였다. 글로 써서 물으니, 십자(=Ⅹ자) 셋에 나머지는 여섯을 세고, 거듭해서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또, 십자 둘에 나머지 여섯을 세고, 거듭해서 눈을 감고 쓰러지는 모습을 만들어 냈다.

 

생김새가 괴이하고 의상이 다르게 만들어 졌다.
비록 언어는 통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자신의 가슴을 두드린 것은 생존자의 수를 뜻하며, 눈을 감고 쓰러진 것은 사망자의 수이다. 그 생사자의 수를 조사해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한왜역과 유구국에 표류했다 돌아온 자 모두가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사정을 물어 볼 길이 없었다.

 

남만 서양 등의 사람들이라는 의심이 들어 이것을 계문한 즉, 남만의 표래인(漂來人) 박연을 내려 보냈다.
언서로서 문답한 것을 번역하기에 이르러 별지로 치계하였다.
박연과 표만 3인은 첫머리에 서로 만나자 오랫동안 눈여겨 자세히 보다 말하기를 “나와 같은 형제 사람입니다.”하였다.
따라서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슬피 눈물을 흘려 마지 않았다.
박연 역시 눈물을 흘렸다.

 

다음 날 박연은 만인들을 모두 불러 자기가 살고 있던 지명을 각각 말하게 하였는데, 모두가 남만 땅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어린이가 겨우 13살이고 이름을 너넷고불센이라고 하는 자가 홀로 서양 나라 땅에 있을 때, 박연이 살던 근처 사람이었다.

 

박연이 자기 친족에 대해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살고 있던 집은 부서져 옛 터엔 풀이 가득하고 그의 아저씨는 돌아가셨지만, 다만, 친족은 있다고 하였다.
박연이 더욱 비통함을 이기지 못해 하였다.
박연이 또 묻기를 “너희들의 의복제도가 어찌 옛날과 다른가”하니 답하기를, “그대가 떠난 뒤 세월이 이미 오래되었고, 의복제도와 범사가 모두 옛날 것이 아닙니다.”하였다.

 

또 묻기를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어떤 물건이고 장차 어디로 가려는가”하니, 대답하기를 “사탕, 후추, 목향 등의 물건을 구해가지고 도안도(타이완)에 가서 사슴가죽을 사다가 중원에 가서 팔고, 그러고는 일본에 가서 장차 목향으로 왜물건을 사려고 합니다.
바다 한 가운데서 갑자기 악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이곳에 이르러 부서졌다. 고향을 떠난지 이미 5년이 되었는데, 고향 땅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매일 밤 하느님께 빌고 있는데, 만약 정말로 우리들을 살려서 일본에 보내준다면, 곧 우리 나라의 상선이 반드시 많이 내박(來泊)해 올 것이다. 때문에 이 편에 살아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박연이 말하기를, “일본이 시장을 열어 놓은 곳은 오직 나가사키(長崎)뿐이다.
그러나, 교역하는 일은 이전과 달라 타국의 상선이 하륙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선상에서 서로 거래하는데, 그 나라 사람이라도 타국에 왕래하는 자는 반드시 죽인다.
하물며 너희들 타국인은 어찌하겠는가.
나와 같이 서울로 올라가 도감(훈련도감)의 포수로 입속하는 것만 못하리라. 즉, 옷과 먹을 것에 여유가 있고, 몸이 안전하여 무사할 것이다.”고 하였다.
표류한 만인 등이 이 말을 듣고 나서부터 고향 땅으로 돌아가는 것에 절망하고, 자못 함께 일하자는 감언을 믿었다.

 

만인들은 먼저 이름을 말하고 그 다음에 성을 말했다. 글자를 쓰려면 세로의 왼쪽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써갔다. 글자 모양은 마치 언문 같은데, 어찌나 비스듬히 흘려 쓰는지 깨우칠 수가 없었다.

 

생긴 모양은 눈동자가 파랗고, 콧마루가 높고, 피부는 어린 사람은 희고, 장성한 사람은 황백색이었다.
머리털은 황적색인데 자른 나머지가 앞에는 눈썹까지 드리웠고, 뒤에는 어깨까지 드리웠는데, 간혹 전부 깍은 자도 있었으며, 혹은 구레나룻은 자르고 콧수염은 남겨둔 자도 있었다. 키는 커서 8,9척이었다.
남에게 예를 할 때는 모자는 벗고 신발도 벗어 양손을 땅에 짚고 길게 꿇어 앉아 머리를 숙였다. 모자는 바로 전립이었다. 소위 그들의 우두머리인 이라는 자는 技舵工(항해사)으로 날씨를 헤아리고 방위를 분별하는데 능하였다.

 

박연이 거느리고 가서 육지로 나갔는데, 호남의 兵水營에 분속시키고 인접토록 하여 안주시켰다.

그들 병기인 대·중·소포 등의 물건은 모두 本州(제주목)의 무기고에 유치하였다.

제주목사 이원진이 치계하여 말하기를, “배 한 척이 제주의 남쪽에서 부서져 해안에서 멈추었기에

대정현감 권극중과 판관 노정으로 하여금 병사를 이끌고 가서 보게 하였더니,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지만, 배가 바다 가운데에서 전복되어 생존자가 38명이며,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 또한 다르다.

 

배 안에는 약재·녹비 따위 물건을 많이 실었는데 목향 94포, 용뇌 4항아리, 녹비가 2만 7천이었다.

 

파란 눈에 코가 높고 노란 머리에 수염이 짧았는데, 혹 구레나룻은 깎고 콧수염을 남긴 자도 있다. 그 옷은 길어서 넓적다리까지 내려오고 옷자락이 넷으로 갈라졌으며 옷깃 옆과 소매 밑에 다 이어 묶는 끈이 있었으며 바지는 주름이 잡혀 치마 같았다.

 

왜어를 아는 자를 시켜 묻기를 ‘너희는 서양의 그리스도교인가?’ 하니, 다들 ‘야야(耶耶)’ 하였고, 우리나라를 가리켜 물으니 고려라 하고, 본도를 가리켜 물으니 오질도라 하고, 중원을 가리켜 물으니 혹 대명(大明)이라고도 하고 대방(大邦)이라고도 하였으며, 서북을 가리켜 물으니 달단이라 하고, 정동(正東)을 가리켜 물으니 일본이라고도 하고 낭가삭기(郞可朔其)라고도 하였는데, 이어서 가려는 곳을 물으니 낭가삭기라 하였습니다.”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서울로 상경시키라고 명하였다.

 

전에 남만인 박연이라는 자가 보고 “과연 만인이다.” 하였으므로 드디어 훈련도감에 편입하였는데,

대개 그 사람들은 화포를 잘 다루었다.

혹은 퉁소를 부는 자가 있었고, 혹은 발을 흔들며 춤을 추는 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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