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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 난파한 스페르붸르호

1653년 8월15일과 16일 새벽 사이에 제주도 대야수 연변(수월봉 남쪽 해안가에서부터 남제주와 북제주를 경계하는 하천 “고샘이내” 부근까지)에 표착한 하멜일행은 선원 64명중 36명만이 살아남았다.

 

그들은 그 다음 날인 8월17일 정오 무렵에 제주도 사람에게 발견되어 저녁 무렵부터는 100여 명의 인원에게 둘러싸여 감시를 받고 있었다.

 

 

 

약 1~2천 명의 제주도 군사들이 그들의 주위에 배치되었고, 곧이어 이들 중의 일부는 조선 측의 지휘관에 의해 심문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의사소통이 어려웠기 때문에 별다른 정보 교환이나, 난파의 이유 등에 대해서 조선 측은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조선인에 의해 난파선 스페르붸르호의 화물들을 육지로 옮겨 햇볕에 말리는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쇠붙이가 있는 목재들을 태우느라고 분주했다.
당시 제주도의 목사는 이원진, 판관은 노정, 대정현감은 권극중이었는데, 이중에서 판관 노정과 대정현감 권극중이 현장을 감독하고 있었다.
이날 하멜일행이 바위틈에서 발견한 포도주를 이들에게 주자 대단히 만족해하며 깊은 우호감을 나타냈다고 하멜의 그의 보고서에 기록하고 있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목재를 태우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그 중에 들어 있던 화약이 폭발하는 바람에 조선 측의 지휘관을 병사들이 도망치는 일이 발생했다. 하지만, 하멜일행이 다시는 폭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손짓을 하자, 계속 작업이 진행되었다.

 

 

난파선 도둑에 대한 처벌조선 측의 지휘관이 하멜일행 몇 사람을 불러 텐트 안에 있는 일행의 물건을 봉인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하멜일행의 물건을 훔치려다 발각된 몇몇 사람들이 붙잡혀 왔는데, 조선 측 지휘관은 하멜일행이 보는 앞에서 그들에 대한 처벌을 명하였고, 그들의 일부는 발바닥을 맞아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는 자도 있었다고 한다.

 

정오 무렵에 하멜일행에게 출발 명령이 내려져 말을 탈 수 있는 사람에게는 말이 주어지고, 부상으로 탈 수 없는 사람들은 들 것에 실려서 이동하였다.
저녁 무렵에 대정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머물었는데, 하멜은 이날 약 4메일을 여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침 무렵에는 다시 말을 타고 가다 어느 성채 앞에서 아침을 먹었는데, 그곳에는 2척의 정크선(병선)이 정박하고 있었다고 한다. 오후에 제주목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에 당도하자 제주목 건물(현재의 관덕정) 앞에서 제주목사 이원진의 심문을 받았으나, 역시 의사가 소통되지 않았다.
다만, 이원진은 하멜일행이 “야판 낭가사키(일본 나가사키)”라고 하자 그 말은 알아듣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일행은 심문을 받고 왕의 숙부(광해군)가 유배되어 있던 집에 머물게 되었다.

 

이상까지가 하멜일행이 표착한 후부터 제주목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다.

 

 

 

『하멜보고서』 8월17일의 기록에 의하면, 정오 조금 전에 텐트주변에 한 사람이 나타나, 그가 도망친 후, 정오 직후에는 3명이 왔으며, 저녁 무렵이 되자 100여명의 무장한 사람들이 일행을 감시하였고, 다음 날인 18일 정오경에는 1~2천명의 기보병이 일행의 주위를 에워쌌다고 되어 있다.
그 후, 『하멜보고서』 8월22일의 기록에 의하면, “우리들은 아침 일찍 해가 뜨자마자 다시 말을 타고 출발하여 도중에 어느 성채 앞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그곳에는 2척의 전쟁용 정크선이 정박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성채라는 것은 과연 어느 곳일까.

 

 

 

그곳은 바로 명월진(성)이다.
이곳은 이른 아침 대정현을 출발해 아침 식사를 취할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실제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의 「명월조점(明月操點)」에 의하면, 선박이 정박할 수 있는 시설도 있었다. 이러한 논증은 하멜일행이 표착했던 1653년, 명월성에 판옥전선(板屋戰船) 1척과 격군(格軍) 103명이 있었다는 기록으로부터도 확인할 수 있다[『탐라지(耽羅志)』, 제주, 수전소(水戰所)].

 

일본의 연구가 이쿠타 시게루(生田滋)씨는 이 작은 성채를 1961년에 『하멜보고서』를 번역하여 「조선유수기(朝鮮幽囚記)(1)」라는 명칭으로『조선학보(朝鮮學報)』(19집, 1961)에 게재하면서 모슬포에 있는 방호소라고 했다가, 이 번역문을 『조선유수기(朝鮮幽囚記)』(平凡社, 1969)라는 제명으로 출판했을 때에는 차귀진으로 개정하고 있다.

그 근거로서 차귀진에는 방호소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작은 성과 객사, 군기고, 약간의 병사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성채는 모슬포의 방호소도 차귀진도 아니다.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의 「차귀점부(遮歸點簿)」에 의하면, 차귀진에는 진(鎭)만이 있었고, 선박이 정박할만한 수전소는 보이고 있지 않으며, 『탐라지(耽羅志)』에서 제주의 수전소를 기술한 부분에도 차귀진에 관한 그 어떠한 언급도 보이지 않는다.

 

하멜일행이 표착한 장소가 “차귀진하 대야수연변”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쿠타씨의 주장을 검증한다면, 하멜일행은 처음의 표착 장소에서 대정현까지 이송되었을 때 이용한 도로를 다시 한 번 거쳐 제주(本州)로 이동한 것이 된다. 그러나 『하멜보고서』에는 제주(本州)로 이동했을 때, 그 길을 다시 한 번 거쳐 이동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또, 대정현에서 제주목까지 이동할 경우, 차귀진(현재의 고산리) 쪽의 도로를 이용하면 서쪽으로 우회하는 것이 되어 명월성(현재의 명월리)으로의 길을 이용하는 것보다 시간이 더 걸린다.
서양 이국인 36명을 제주목으로 이송해야하는 긴박한 상황에 더 빠른 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표착한 지역의 길로 돌아가 우회도로를 이용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조선시대 제주관련 고지도 중에서 앞에서 언급한 「제주삼현도(濟州三縣圖)」나 「탐라지도병서(耽羅地圖幷序)」를 보면, 명월진의 옆길을 통과하는 도로가 보이고 있으며, 지명과 거리 등이 상세하지는 않지만,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도 이 길은 명시되어 있다.

 

또 1899년의 필사본이기는 하지만, 『대정군읍지』의 「대정군지도」에도 “제주지군상대로(濟州至郡上大路)”로 표기되어 있는 도로가 보이고 있어 이 길을 이용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아무튼 명월성 앞에서 조식을 마친 일행은 다시 출발하여 오후에는 제주목에 도착하여 제주목사 이원진의 심문을 받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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