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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록』은 하멜의 표착으로부터 43년이 지난 1696년제주목사 이익태(李益泰)가 저술한 것으로 1694년 제주목사에 부임하고 나서의 행적, 각 진의 순력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 부록에는 제주도민이나 이국인의 표류·표착 관계 기사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 내용으로부터 볼 때, 사료적 가치는 매우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제주에서의 지방사 연구에는 물론, 표류·표착 관련 연구에서도 별로 이용되고 있지 않다.

 

참고로 표류·표착 관계의 기사에는 「표한인기」(1652년), 「서양국표인기」(1653년), 「김대황표해일록」(1687년), 「남경표청일기」(1690년), 「표왜인기」(2건, 1681·1698년)라고 제목을 붙인 것의 이외에 중국인의 표류·표착 관련 기사가 6건이나 수록되어 있다.
각 사료 속에는 표류민에 대한 표착 경위나 심문 내용 등이 상세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중앙기록에 보이지 않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제주에서의 표류·표착 관계에 한정한다면, 중앙의 어떤 기록보다 제일 먼저 이용해야 할 사료이다.

 

이러한 사건은 저자가 제주에 부임하기 전의 것이지만, 『지영록』의 서문에 밝힌 바와 같이 당시 제주목에 소장되고 있던 여러 등록류를 참고로 한 것이다. 그 안의 「서양국표인기」에는 하멜 일행의 표착 지점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보인다. 여기에서는 표착지 관련 부분만을 제시해 고찰해 보도록 하겠다.

 

당시의 목사는 이원진, 판관은 노정, 대정현감은 권극중이다. 계사년 7월 24일 서양국 만인 등 64명이 함께 탄 배 한 척이 대정현 지방 차귀진하의 대야수 연변에서 부서졌다. 익사자가 26명, 병사자 2명, 생존자는 36명이며,.....

 

우선 위에서 하멜 일행의 정확한 표착 위치를 비롯한 난파의 피해 상황을 알 수 있다.
즉, 총인원 356명만이 생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효종실록』의 표착 보고에는 생존자가 38명으로 되어 있다. 이것에 대해 『효종실록』의 오기라고 말하는 주장도 있으나, 사실은 정확한 것이다. 왜냐하면, 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표착 직후 사망했으리라 추정되는 2명의 병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위의 기록에 보이는 에 대해서 김익수씨는 『지영록』을 번역하면서 헨드릭 하멜이라고 하였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며, 그는 일등항해사 헨드릭 양세(Hendrick Janse)이다. 의 발음이 헨드릭 양세와 거의 비슷하고, 또 「서양국표인기」의 마지막 부분에는 “소위 그들의 우두머리인 이라는 자는 기타공(技舵工, 항해사)으로 날씨를 헤아리고 방위를 분별하는데 능하였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어 이 항해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하멜보고서의 필사본과 『후팅크판』에는 1655년 탈출하여 귀국하는 청국 사신 앞에서 본국 송환을 요청하는 소동을 일으킨 두 사람에 대해 “opperstuijrman Hendrick Janse van Amsterdam ende Hendrik Janse Bos van Haerlem(암스텔담 출신의 일등항해사 헨드릭 양세와 할렘 출신의 헨드릭 양세 보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헨드릭 양세가 조선인에게 하멜 일행의 거수(居首), 즉 우두머리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제주에 난파했을 당시 선장이 사망하였기에 그가 일등항해사로서 일행의 대표가 된 것이다.
그는 위에 보이는 탈출 사건으로 인해 붙잡혀 감옥에서 사망하였다(『효종실록』효종6년 4월 을묘조).

 

다음으로 『지영록』에는 하멜 일행이 승선하고 있던 선박이 “대정현 지방 차귀진하의 대야수 연변에서 부서졌다.”고 기술하고 있어 표착지가 대야수 연변임을 알 수 있다.
차귀진은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의 「차귀점부(遮歸點簿)」에 의하면, 고산과 당산악 사이에 있는 진을 가리키고 있으며, 대야수 연변은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의 1702년 「한라장촉」에 의하면, 고산의 남쪽 해안 부근에 대야수포(大也水浦)가 있으므로 그 부근 해안으로 추정된다.

 

 

 

고산은 때로는 고악산이라고 불리고 있었으나, 현재는 수월봉이라 불리고 있으며,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한경면 고산리이다.
『지영록』에 보이는 대야수(大也水)가 수월봉의 남쪽 해안 부근인 것은 명확하다.

 

『한라장촉』에 보이는 대야수포  『제주삼현도』에 보이는 대야수포

 

그러나 하멜 일행의 표착지를 수월봉의 남쪽 해안으로 비정한다면, 그곳으로부터 옛 대정읍까지 지도상의 직선거리로는 약 12Km가 되며, 『하멜보고서』의 기록, 즉 표착지에서 대정까지 이동했던 거리 4메일(22.2Km)과 차이가 발생한다. 하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4메일은 하멜이 추측한 거리로서 부상자들과 함께 들것에 실려 이동하고 있었던 만큼, 이 4메일만을 근거로 표착지를 추정하는 것에는 약간의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또 17세기 중엽에 차귀진 부근에서 대정현까지 도로가 있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직선거리가 약 12Km이므로 도로상의 거리는 이보다 더 길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또,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수월봉 남쪽 해안 부근에는 현재도 대물· 큰물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대=大”, “큰=大”, “야=也”, “수=水”, “물=水”로 음가를 빌린다면, 대물은 대수(大水)이며, 큰물도 대수(大水)가 된다. 대야수포(大也水浦)라는 것은 대야수가 있는 포구를 의미하거나, 대물이나 큰물이 있는 포구를 의미할 수도 있다.

 

 

 

『남사록』은 김상헌이 안무어사로 제주도에 파견되어 기록한 것인데, 대정현의 병선을 정박시킬 수 있는 포구를 설명하면서 대정현에서 “…대야수포는 서쪽으로 30리(里), 서림포는 서북으로 15리(里), 모슬포는 남쪽으로 10리(里)…”에 있고, 차귀방호소(遮歸防護所)는 대정현성의 서쪽 26리(里)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의 30리(里)는 10리가 약 4.5Km이므로 대야수포는 대정현에서 서쪽으로 13,5Km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하며, 26리(里)는 11.7Km이므로 차귀방호소(遮歸防護所)는 서쪽으로 11.7Km떨어진 곳에 있다는 것이 된다.
이원진의 『탐라지』에는 차귀성(遮歸城)이 25리(里)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야수포(大也水浦)가 대정현의 서쪽에서 30里(13.5Km)에 있다는 부분으로 현재의 수월봉 남쪽 해안에서 구 대정현까지의 직선거리 약 12Km와 거의 비슷하다는 점이다.

 

또, 당시에 도로가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그 도로가 지도상의 직선보다는 약간 더 길 것이라는 오차를 둔다면, 『남사록』에 보이는 13.5Km 내외일 것이기 때문에 거의 같은 거리라고 볼 수 있다.

 

이는 표착지의 범위를 정하는데 무척 귀중한 논거가 되는 점으로 대정현에서 서쪽으로 13.5km 떨어진 해안가 주변이 바로 하멜 일행의 표착지가 된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오차를 감안하더라도 수월봉 남쪽(남동쪽) 해안가 주변이며, 이는 대물과 큰물이 있다는 해안가를 포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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