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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는 14세기의 르네상스를 시작으로 15세기부터의 대항해시대, 15-16세기의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17세기에는 세계의 구도가 바뀔 정도의 변혁기를 가져 왔다.

즉, 15-16세기에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등의 구교권(가톨릭의 예수회) 국가들이 대항해시대를 열게 되어 세계의 강국으로 대두되었으나, 1588년 에스파냐의 무적함대가 당시 거대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던 영국의 본토 공격에 실패해 궤멸하면서 결정적 타격을 입어 세력이 약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무적함대의 패배로 인해 에스파냐는 해상 무역권을 영국에 넘겨주게 되었고, 네덜란드가 독립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더욱이 아시아에서의 무역 경쟁에서도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실패를 거듭함에 따라 세계의 판도는 변화되기 시작했다.

그 후 17세기가 되어 1600년에는 영국이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였고, 1602년에는 네덜란드가 동인도연합회사(VOC)를 설립하면서, 구교에서 갈라진 영국과 신교권 프로테스탄트 계통의 네덜란드세계의 강국으로 부상한 것이다.

그만큼 17세기는 세계 변혁의 정점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동아시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15-16세기에 명은 북로남왜, 즉 북으로는 오이라트와 타타르 부족들이 변방을 침입해왔고, 남쪽으로는 왜구의 침입이 잦아 국내외의 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세력 또한 약화되기 시작했다.
더욱이 1592년 일본의 조선침략(임진왜란/정유재란)으로 인해 명은 막대한 전력과 경제력을 소비하게 되었고, 국내 정쟁으로 인해 세력 약화를 더욱 촉진시켰다. 이 기회를 틈타 여진은 세력을 강화시키고 있었다.

1592년에 발생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침략전쟁인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의해 조선의 전 국토는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황폐해 있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7년간에 걸쳤던 이 전쟁은 백성을 도탄에 빠트렸고, 정치·경제·문화·사회·사상 등 각 방면에 걸쳐 조선 정부에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
따라서 일본의 패전 후에 정부 관료들의 급선무는 전란으로 인한 문물의 파괴, 재력의 탕진을 극복하는 것이었는데, 정치·군사적인 면에서는 비변사(備邊司)의 역할이 강화되었고, 훈련도감을 비롯한 군사기구의 개편도 시작되었다.

 

하지만, 전쟁의 상처가 아무를 틈도 없이 국내에서는 인조반정의 논공행상 문제로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반란군은 평안도와 황해도 등을 차례로 점령하고 평산(平山)에까지 진격해왔다. 중앙에서는 토벌군을 보냈으나, 오히려 반란군에게 패하는 형국으로 이후, 경기도의 벽제에까지 이르렀다. 이로 인해 인조는 공주로 피란을 갔고 한성은 반란군에게 점령되었다.

 

이괄은 1624년 2월 11일 선조(宣祖)의 열번째 아들 흥안군(興安君) 제를 왕으로 추대하기도 하였는데, 이 날 밤에 토벌군에게 패하여 이괄은 경기도 이천으로 도망하였다.
결국, 처벌을 두려워한 기익헌·이수백 등 부하들의 배신으로 그는 목이 베여 난은 평정되었다.

 

이러한 혼란은 연이은 여진족의 침략으로 더더욱 조선 정부를 혼란케 만들었고, 왜란에 의한 상흔은 거의 복구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즉, 명의 약화를 틈타 1616년 누르하치가 선양(瀋陽)에 후금(後金)을 세우고 1627년에는 조선에 침략하였으며(정묘호란), 1636년에도 제2차 침략을 감행하여(병자호란) 조선을 공략하였다.

 

그 결과 조선은 청의 조공책봉체제 속에 포함되었으며, 이를 시작으로 동아시아권에서 한족을 대신해 여진족이 정권을 획득하게 되는 이른바 명·청교체가 일어나게 되어 새로운 국제질서가 편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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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조선에서는 인조의 뒤를 이어 효종이 즉위하였는데, 효종은 조정과 선왕의 굴욕을 씻기 위해 북벌계획을 추진하여 이를 무엇보다도 중요한 대외정책의 하나로서 강력하게 주도해 나아갔다.


즉위 당시부터 효종의 북벌계획은 모색되어 지고 있었으나, 재위 3년째인 1632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북벌을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가 북벌인사의 규합, 병제개혁, 전략·전술의 정비, 관무재(觀武才)와 열병식(閱兵式)에 의한 인재 선발과 군사 훈련 등을 실시하며 군사력 강화에 힘을 들였다.
또한, 북벌정책의 일환으로서 대사헌 김익희와 양병책을 논의하는 과정 중에 정예 10만의 북벌군을 양성하자는 논의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여기서 “항왜(降倭)”라는 것은 원래 왜구를 토벌했을 때 투항한 일본인을 의미하지만, 일본의 변방민이 생활고로부터 도망쳐 조선에 귀화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으며, 그들도 마찬가지로 “항왜”라고 불리고 있었다.


특히, 그들 중에 조총제조와 검술에 뛰어난 자는 중앙의 훈련도감과 군기시에 배속시키고, 또 조총을 제조하는 산철지에 파견하여 그 武器와 武技에 단련케 하였으며, 조정에서는 누차 일본의 조총을 입수하려는 논의가 행해지고 있어 청국의 침략 이전부터 조선의 군사력 강화는 중요한 국가적 차원의 문제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627년 조선에 표착해 온 박연(벨테브레)과 동료 2명은 청의 제2차 침입인 “병자호란” 때, 전투에 참전하여 동료 두 명은 전사하고, 박연만이 살아남게 되는 것이다.
박연은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조선의 서양식 신식무기 개발에도 관여하여 조선의 무기발달에도 기여를 하게 된다.

 

또한 1653년 제주도에 표착해 온 하멜 일행도 역시 훈련도감에 배속되는데, 처음에 훈련도감에 하멜 일행을 배속시킨 이유가 박연과 같이 그들을 군사력 증강이라는 측면에서 이용하려했던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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