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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보고서 필사본

기록한 사람은 당시 제주에 난파했던 스페르붸르(Sperwer)호의 서기를 담당하고 있던 헨드릭 하멜로서 13여 년간 조선에서의 체재경험과 조선에 관한 정보를 정리한 것이다.
『하멜보고서』는 17세기 조선의 정치·경제·외교·사회·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기술하고 있어 그 사료적 가치는 평가할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하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기록은 일반적으로 한국에서는 『하멜표류기』, 일본에서는 『조선유수기(朝鮮幽囚記)』로 불려왔고, 대다수의 경우 『하멜표류기』가 일반적으로 통용되어 왔다.

 

그것은 한국에서 이병도씨가 1934년에 처음으로 『진단학보(震檀學報)』에 『하멜보고서』를 번역하여 연재했을 때, 『하멜표류기』라고 명명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이쿠타 시게루(生田滋)씨가 1961년에 이 기록을 『조선유수기(朝鮮幽囚記)』라고 명명하여 사용한 것이 처음이다.


그 외에 1994년부터 장 폴 바이즈에 의해 『하멜일지』라는 명칭도 사용되고 있는데, 이러한 『하멜표류기』,『조선유수기(朝鮮幽囚記)』,『하멜일지』라는 명칭은 번역자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한 것으로 누구나가 자의적으로 붙여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최근에 하멜과 관련된 연구가 조선과 네덜란드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제관계사 속에서 새롭게 연구가 시작되면서 『하멜보고서』라는 명칭이 일반화되고 있다.

그리고『하멜보고서』라고 불러야할 또 다른 이유의 하나는 이 보고서가 하멜 일행에게는 조선에서 장기간 체재하고 있던 기간 중에 동인도회사로부터 받지 못한 급료를 청구하기 위한 중요한 증거물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동시에 그들이 조선 체재 기간 중에도 조선에 대한 정세와 정보를 네덜란드에 알리기 위해 기록한 상세한 관찰보고서의 성격을 가지고도 있는데, 이는 하멜 일행이 VOC 일원으로서 그 역할과 회사를 위한 업무에 충실하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자료로서의 가치도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하멜보고서』는 단순한 흥미본위의 『표류기』 내지는 『일지』, 또는 조선에 억류되어 기록했다는 『유수기』의 성격이 아니라, 회사의 이익을 추구한 현실적 필요성을 내포한 역사적 기록물의 성격이 더 강하다.


한편,『하멜보고서』에 대해 일찍이 연구를 시작한 미국의 게리 레드야드는 『The Dutch Come to Korea(한국에 온 네덜란드인)』이라는 책에서 하멜이 조선을 탈출 한 후, 나가사키(長崎) 데지마(出島)의 네덜란드 상관에 체재한 기간, 즉 1666년 9월부터 일본을 떠난 1667년 10월 사이에 집필한 것이라고 했으며, 이쿠타(生田滋)씨도 『조선유수기』해제에서 같은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에서 약 1년간의 사이에 조선에서의 체험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는 충분히 있었다.

『하멜보고서』에도 그들이 나가사키에 도착한 후, 나가사키 봉행(奉行)의 심문기록과 데지마에서의 행적 등이 기록되어 있어 나가사키에서 기록되고 있었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이 기록에는 조선체재 13여 년간의 여정과 사건에 대해 날짜와 시간조차도 거의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특히 1653년 일행이 제주에 난파할 당시의 기록은 마치 어제의 일과 같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13년이 지난 후 데지마에서 이렇게 상세한 기억을 떠올려 기록할 수가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물론, 1655년부터는 간단한 내용만을 기록한 연도도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조선의 여러 기록과 비교해보더라도 지명은 물론, 어느 한 사건의 내용에 대해서도 거의 정확하다.
그것은 조선 체재 기간 중에 어느 정도의 상황에 대한 기록을 계속적으로 기록하고 있었고, 그 기록물을 탈출했을 때 가지고 나와 그것을 근거로 기록한 것이 아닌가라고 추측케 하는 부분이다.

더구나, 하멜은 서기로서의 역할도 있었기 때문에 늘 어떠한 형태로든 기록을 계속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하멜 일행이 탈출하고 난 뒤, 조선에 남아있던 그들의 동료 7명이 일본의 송환요청에 따라 송환이 실시되고 있을 당시, 쓰시마(대마도)의 사료인 「아란타인조선강표착지일건(阿蘭陀人朝鮮江漂着之一件)」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적혀있다.

.....네덜란드인이 가지고 있던 물건의 송장(送狀)과 네덜란드인의 서물(書物), 그리고 동래(동래부를 말함)로부터는 네덜란드인에게 주는 선물의 목록을 받아들어 모두 하옥포(下屋鋪, 왜관)에 넘겼다......

 

즉, 네덜란드인에게는 그들 자신만의 물건이 존재했음과 동시에 서물(書物)이 있었다는 것인데, 이것이 조선정부가 일본 측에 송환하면서 그들에게 준 선물의 목록과 함께 일본 측에 전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보이는 서물이 어떠한 종류의 것인지 명확하게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조선에 체재하고 있었던 동안 소지하고 있었던 것이며, 송환될 당시에도 지참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 서물이 네덜란드인에게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반드시 일본으로 가지고 가야할 필요성이 존재했던 것임에 틀림없다.


상기의 사료는 하멜 일행 8명이 조선을 탈출하고 난 뒤 2년이 지난 1668년으로 조선에 남아있던 네덜란드인 7명을 송환할 때의 기록이지만, 하멜 일행도 마찬가지로 탈출했을 때 그들의 기록을 몸에 지닌 채 탈출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더욱이 『하멜보고서』에는 표착하고 나서부터 1662년도의 기록까지 연도순으로 조선체제의 경험이 서술되고 있는데, 1662년도의 중간에서부터 갑자기 “조선의 정세에 관한 상세한 기록”(일반적으로 말하는 『하멜보고서』의 「조선국기(朝鮮國記)」가 삽입되어 있다.
그후 다시 1662년부터 연도순으로 조선체류의 경험을 기록하고 있으며, 나가사키에서의 심문조서 54개 항목의 내용과 그들의 답변이 기록되고 있다.


만약, 『하멜보고서』가 나가사키의 데지마에서 처음부터 작성된 것이라면, 13여 년이 지난 표착 당시의 상세한 기록을 정리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때문에 1662년을 시점으로 『하멜보고서』의 중간에 조선정보가 갑자기 삽입되어 서술되고 있다는 점은 『하멜보고서』의 유래를 살피는데 중요한 판단점이 될 수 있다.

아무튼, 이 보고서가 나가사키에서 전부 기록되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한편, 일본의 연구자 이쿠타씨는 『하멜보고서』가 2통이 작성되어 1통은 동인도회사 바타비아총독에게 제출되었으며, 나머지 1통은 하멜보다 먼저 본국에 귀국한 7명의 동료들에 의해서 본국의 동인도회사에 제출되어진 것이라고 한다.
즉, 하멜은 1667년 나가사키를 출발할 당시 동료 7명과 함께 바타비아까지 갔으나, 그 자신은 바타비아에 남아있고, 동료 7명이 『하멜보고서』 1통을 본국으로 가지고 간 것이다.


이에 대해 6통이 만들어졌다는 견해도 있어 어느 것이 사실인지 확인할 길이 없지만, 이후 『하멜보고서』는 1668년 암스테르담에서 출간되었으며, 계속해서 프랑스어·독일어·영어판으로 번역·출판되었고 유럽의 전 지역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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