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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C 선박의 타일타브로

 

이에 따라 네덜란드 선단이 출항하였지만, 조선에는 이르지 못하였고, 또 태풍과 적절한 항해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결국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이 당시 중국 쪽의 펑후 지역을 점령하기는 했으나, 중국측의 저항이 의외로 강해 결국은 펑후를 반환하고 타이완으로 후퇴함으로서 이 “원정”은 종결되었고, 이에 따라 조선에 대한 “원정”도 포기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VOC가 조선 무역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1628년 6월 바타비아의 기록에 의하면, 사령관 카렐 리벤즈(Carel Lievensz)가 9개월분의 식량과 무역품을 실고 6척의 선단과 함께 타이완과 중국 연안을 향해 출항하였는데, 당시 그에게는 “…필요한 경우에는 코리아까지도 전진하여 그 어떠한 수단을 다해서라도 그 지역과 무역을 개시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만 한다.”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1633년 하급 상무원으로 일본의 히라토에 부임하여 다음해부터 나가사키로 옮긴 윌렘 훼르스테헨(Willem Verstegen)이 1635년 12월7일에 금은도(일종의 보물섬) 탐험의 필요성을 바타비아 총독과 VOC의 평의원들에게 건의하고 있다. 그것은 유럽에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고 있던 일본 주변 지역의 금은도 조사에 관한 것으로 VOC도 금은도 탐험에 나서야만 한다는 취지의 의견서였다. 그 의견서의 마지막 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를 끄는 내용이 있다.

 

.....금은도 탐험을 위한) 예정의 항해와 나아가 북방의 중국, 조선 등의 나라에 탐험을 실시하기 위해 야하트선을 고용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국가로부터 또 이 국가를 통해 커다란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원주민 자신들이 인정하고 있다. 황제의 무역허가장은 통킨(베트남 북부)이나 코친시나(베트남 남부)와 마찬가지로 시나(중국)와 조선에 가는 길에도 항상 부여되고 있다.

 

이 내용을 보면, 금은도 탐험의 조사지역으로서 중국과 조선 등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중국과 조선에서 행해지는 무역 거래의 많은 이익을 언급하여 그러한 지역과의 교역도 촉구하고 있다.

 

이러한 건의에 당시 바타비아 총독이었던 안토니오 환 디멘(Antonio van Diemen)은 사업가로서 이러한 금은도 탐험을 대환영하였다. 이에 따라 총독은 그 건의를 실천에 옮기고자, 이듬해 1636년 5월26일, VOC 평의회의 결정을 받아냈고, 당시 바타비아에 체재하고 있던 히라토 네덜란드 상관장 니콜라스 쿠케박케르(Nicolaes Couckebacker)에게 이 건에 대한 조사를 명했다.
그리고 항해를 2척의 선박으로 실행할 것과 북중국 및 조선으로의 항해도 포함시키는 것에 대한 가능성에 대해서도, 이 지역에 상세한 선장과 항해사에게 상담할 것을 지시하고 있었다.
즉, 금은도 탐험을 실시하면서 동시에 조선을 포함한 지역의 탐사도 그 목적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 보고는 당시 VOC가 가지고 있던 조선정보가 막연하고 확인되지 않은 정보였던 것과는 달리, 꽤 구체적이고 다양한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이 나라는 일본과 거의 동일한 크기로, 큰 원형의 섬이고 작은 섬들 사이에 있고, 그 한 끝이 시나에 접해 있지만, 그 나라는 약 1마일 정도 폭의 강으로 갈라져있다. 코레아의 다른 한 쪽은 타르타리아에, 양자의 사이에는 폭 약 2.5마일의 수로가 있다. 동쪽은 약 28 내지는 30마일은 떨어진 곳에 일본이 있다. 상기의 코레아에는 금광과 은광이 있지만, 굉장한 것이 아니다. 명주도 산출하지만, 자국에서 필요로 하는 것보다 적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시나로부터 명주가 수입된다. 이 땅에서 특히 풍부히 얻을 수 있는 것은 쌀 1량에 20 라스트, 동, 목면, 면직물, 인삼 뿌리이다. …코레아에서 일본과의 거래는 대마 영주만의 것이고, 누구에게도 허용되고 있지 않으며, 영주도 5척의 큰 배를 가지고 있을 뿐으로 그 이상의 배를 그곳에 파견할 수 없다. 그 곳에서 면, 면직물, 인삼근, 매, 호피를 입수하여, 1의 값을 일본에서는 3·4로 받는다. 따라서 거래에서 상당한 이득이 있기 때문에, 영주는 이 거래에 타인이 참가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들이 들은 바에 의하면, 회사가 그곳(조선)에서 무역을 행하려고 해도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매우 소심하고, 겁쟁이 사람들로서 특히 외국인을 상당히 두려워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쿠케박케르의 조선에 관한 정보는 당시 VOC가 가지고 있던 정보보다도 구체적이고 정확한 것이었다.

 

지리적 조건에 대해서도 조선이 아직 섬으로서 인식되고는 있지만, 조선과 중국의 사이에 있는 압록강과 두만강의 존재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섬이라고 기록한 바와 같이 당시 네덜란드인들은 조선이 섬인지, 대륙인지, 반도인지, 확실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그 하나의 예로서 당시 유럽 지도에는 조선이 표기되어있지 않은 것도 있고, 양슨(J.Jansson)의 “일본지도”와 브라우(W.Blaeu)의 “세계지도”, “아시아지도”에 보이는 바와 같이 1650년경의 지도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섬으로서 그려져 있던 것을 보더라도 추측할 수 있다.

 

단지, 같은 시기에 제작된 브라우의 “중국지도”와 “일본지도”에는 조선이 반로로 그려지고 있어, 17세기 중반을 전후해 반도로서의 인식이 정착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쿠케박케르는 조선에 금광과 은광이 있지만, 그다지 생산량이 많지 않다는 것, 명주의 산출은 있지만 중국으로부터 수입하고 있다는 실상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쌀, 동, 목면, 견직물, 인삼 등이 풍부하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상당한 무역이윤이 있기에 대마번은 이를 용인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VOC가 조선과 무역을 하려해도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 쿠케박케르의 생각이었다.

 

한편, 윌렘 훼르스테헨의 의견서에 의해 바타비아 총독이 금은도 탐험을 계획하게 되었으나, 이것이 실행된 것은 1639년이 되어서였다.
실행이 지체된 이유는 히라토 상관의 기록에 의해 명확해 진다.
다시 말하면, 타이완과 바타비아로 항해하기 위한 선박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1639년 6월2일에 북위 36~39도에 있는 금은도를 발견하기 위해 콰스트(Mathijs Quast)의 지휘아래 프라이트선 앵겔호와 흐라흐트호에 의한 탐험대가 구성되어 바타비아를 출발했다. 목적은 물론 금은도 탐험이었는데, 그 외에도 타르타리아, 조선 주변의 북쪽 해안과 서인도에 이르는 해역을 조사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금은도가 있다고 하는 위도 상을 일본의 동쪽으로 600해리 정도를 항해했어도 그곳을 발견하지 못했고, 그곳에서 다시 일본 북방해역 탐험을 위해 서쪽을 향했지만, 선원의 질병으로 인해 탐험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두 선박은 승무원의 약 반수에 해당하는 38명의 손실을 입고 비참한 상태로 타이완에 돌아왔다.

 

 

 

1643년 초두에 바타비아 총독 디멘은 달단, 아메리카 서해안 및 금은도에 대한 새로운 탐험을 결정하고, 후리스(M.G.Vries)와 스하프(H.C.Schaep) 두 선장의 지휘 아래, 커스트리컴호와 브레스켄스호 2척에 의한 탐험을 실시케 하였다. 그 중에서 브레스켄스호는 일본의 야마다(山田)에 표착하여 항해를 중단하게 되는데, 나머지 한 척 커스트리컴호는 항해를 계속해 북해도와 千島(쿠릴열도), 사할린 등의 지역을 조사하여 북방 지역에 탐험에 어느 정도의 성과를 올리게 되었고, 이는 VOC에 잘 알려지지 않은 북방지역의 지리인식을 확대시켰다.
그러나 금은도 탐험은 완전히 실패로 끝나버렸고, 그 후로 VOC의 금은도 탐험에 대한 계획은 두 번 다시 나타나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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