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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작을 1653년 하멜일행의 조선 표착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나, 그것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1627년에 이미 네덜란드인 양 양스 벨테브레(조선 이름: 박연)라는 선원이 동료 2명과 함께 조선에 표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을 시작으로 볼 수는 없지만, 하멜일행이 처음은 아니다.

 

이준열사 당시 신문기사우리나라와 네덜란드가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맺은 것은 놀랍게도 1961년 4월4일이다.

 

그 이전에도 너무나 아픈 한국의 근대사와도 관련이 있다.
바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제국주의 침탈에 항거해 1907년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이준 열사가 파견되었으나, 일본의 방해 공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국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후에도 벨기에 등의 서유럽 국가 등의 알선으로 한국과의 정식 수교를 맺을 기회는 있었으나, 결국 성사되지 못하다가 1661년이 단독수교가 이루어진 것이다.

 

1968년 12월에는 주한 네덜란드 대사관이 설치되고 1969년 10월에는 주(駐) 네덜란드 한국대사관이 설치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최근 2001년에는 북한과도 수교를 맺고 있다.

 

 

 

근세라는 시기(=조선후기)에 네덜란드와 일본과의 관계는 1600년 리흐데호의 표착으로부터 계속적으로 유지되고 있었으나, 막말부터 일본 국내에서 네덜란드의 지위는 하락되었고, 결국 단절 상태로 들어간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또 다른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일본군이 인도네시아 지역을 침공하면서부터 이다. 즉 네덜란드의 영토를 침공함으로써 일본은 네덜란드의 적국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네덜란드 본국은 이미 독일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식민지군은 인도네시아의 네덜란드군은 거의 저항도 하지 못한 채 1942년 3월에 일본에 패배하고 말았다. 당시, 네덜란드군 4만, 민간인 9만 명을 포로로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당시에 많은 네덜란드 종군위안부들도 이때에 발생하였으며, 수많은 인명이 일본군에 의해 살상되었고, 비인간적인 대우와 강제노동으로 인해 지금까지도 일본군의 잔혹한 행위는 인류의 지탄을 받고 있다.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에도 네덜란드에서는 반일 감정의 뿌리가 매우 깊이 박혀 있었으며, 특히 1971년의 쇼와(昭和) 일본국왕의 네덜란드 방문 시에 계란을 던지거나 기념식수의 나무를 뽑기도 했다.
1986년에는 유리아나 여왕의 일본 방문이 국내 여론의 반발에 의해 중지되었고, 또 1991년에는 일본을 방문한 여왕이 만찬회에서 일본의 전쟁 책임에 대해 명확히 언급하여 일본 국내에서는 파문이 있기도 하였다.

 

결국, 1995년, 일본의 무라야마(村山) 수상이 담화문을 발표해 일본의 침략전쟁과 그에 따른 범죄 행위에 대해 “통절한 사과와 반성”을 발표하였고, 1998년에 하시모토 수상이 재차 무라야마 담화를 재확인하는 서간을 보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과거 360여 년간 친밀했던 네덜란드와 일본의 관계는 일본의 잔학무도한 비인간적인 행위로 말미암아 지금까지도 치유되지 않는 많은 상처를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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